미국은 ‘김대중 당선’을 지지하는가
  • 李叔伊 기자 ()
  • 승인 1997.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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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부·CIA 고위 관계자 비밀 접촉 잦아…한국 정부 촉각 곤두세워
한국 대선이 두 달 앞으로 성큼 다가오면서 태평양 건너 미국 백악관의 안테나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10월20일 낮 12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한 핵심 측근은 외국인과 오찬을 같이 했다. 그의 이름은 에릭 존. 미국 국무부 한국 담당 과장이다. 그는 토니 홀 하원의원과 지난 10월14일부터 4일간 북한을 방문했었다. 한국 정부에 방북 결과를 알리기 위해 입국한 그는 이 날 극비리에 DJ의 측근을 만나 김총재에게도 방북 결과를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당초 이번 방북 결과를 김총재에게 전달하는 역할은 토니 홀 의원이 직접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민감한 시선을 의식한 미국측은 현역 의원인 토니 홀 대신 에릭 존을 보냈다. 김총재와 토니 홀의 만남을 주선했던 국민회의 관계자는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이후 여권이 부쩍 미국측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국은 여러 차례 ‘한국 대선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의 어느 대선 주자와도 만나게 하지 않겠다고 미국 국무부가 내부 방침을 세운 것이나, 미국 관리들이 김대중씨가 당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워싱턴 포스트>의 최근 보도에 대해 즉각 부인 성명을 낸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미국은 겉으로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으며 어느 당선자와도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안으로는 DJ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주는 듯한 움직임이 다양하게 포착되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선 에릭 존의 경우처럼 미국 고위 관료들이 빈번하게 DJ측과 접촉하며 고급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 거점장인 마이클 브라운이 지난 6월25일 DJ에게 황장엽씨 조사 결과를 설명한 것. 당시 그는 DJ에게 ‘황장엽 리스트는 없다’고 확인해 주었는데, 이 덕분에 국민회의는 황풍의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의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 브라운은 머지 않아 DJ의 일산 자택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DJ측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방북 문제를 비롯한 최근의 정세 변화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국민회의측은 브라운과 약속했는지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지난 6월의 만남이 외부에 노출된 후 주한 미국대사관측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보안 요청 때문에 지난 9월27일 저녁 미국 국무부 카트만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가 DJ를 만난 사실도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DJ가 월드컵 축구 한·일전을 관람하러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날 서울에서 만난 두 사람은 4자 회담을 둘러싼 각국의 입장과 전망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미·북한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카트만은 이번에 북한을 방문한 에릭 존의 직속 상관이기도 하다.

한편, 오래 전부터 친 DJ 인사로 알려져온 크리스텐슨 주한 미국 대리 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도 수시로 DJ측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슨텐슨은 목포에서 오랫동안 군 생활을 했으며, 한국인인 그의 부인도 목포 출신이다. 제임스 위트락 정무 참사관은 10월18일 저녁 DJ의 한 측근과 식사를 하며 대선 정국에 관한 교감을 나누었다.

미국 관리들과 DJ측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미국 언론의 논조도 차츰 DJ에게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번에 파문을 일으킨 <워싱턴 포스트>말고도 대다수 미국 언론이 김총재를 직·간접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 언론은 대외 문제에 관한 한 미국 정부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DJ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일까. 이에 대해 미국 국무부의 한 소식통은 DJ가 현재 미국측 입맛에 가장 잘 맞는 후보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미국이 볼 때 한국의 다음 지도자는 북한 권력을 승계한 김정일에 맞설 만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 미국은 또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북한의 개방을 유도해 연착륙시킨다’는 그들의 대북관에 발을 맞출 수 있는 파트너이기를 원한다. 미국은 그동안 강온 노선을 오락가락한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겨왔다는 것이 이 소식통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미국이 가장 잘 아는 후보가 DJ라는 점이다. 미국은 다른 생소한 후보와 달리 DJ의 성격과 정책 방향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주한미군 철수 반대’ 등 보수화 전략 주효

미국이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기까지는 김총재의 꾸준한 자기 PR와 보수화 전략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관리들은 특히 지난 4월 DJ가 미국 국방대학원에서 한 연설이 DJ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 보수층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DJ는 이 연설에서 자신의 통일관인 ‘햇볕론’과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않겠다는 소신을 강하게 피력했다. 당시 이 연설회장에는 미국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군 장성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이들이 DJ의 연설을 듣고 난 후 고정 관념을 많이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 미국 관리들의 전언이다. 그동안 미국 보수층은 늘 DJ를 반미와 급진주의로 무장한 ‘위험 인물’로 여겨 왔다.

미국에 정통한 국내 정치인과 학자 들은, 미국은 한번 밀겠다고 마음 먹으면 확실하게 미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난 8월 신한국당 이사철 대변인이 미군 함정을 들먹이며 DJ의 용공 전력을 들고 나왔을 때 미국대사관측이 즉각 DJ에게 유리한 보도 자료를 낸 것이 바로 미국의 의중을 외부에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풀이했다. 이런 시각이 맞다면, 앞으로 DJ를 지원하려는 미국의 속내는 점차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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