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사로잡는 ''인기 캡'' 상표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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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겨냥한 ‘브랜드 전쟁’ 가열…토속어·비속어 과감히 이용
컵라면 ‘캡틴’을 생산하는 빙그레는, 얼마전 캡틴의 우리말 발음은 그대로 둔 채 영어 표기만 ‘CAPTAIN’에서 ‘CAPTEEN’으로 바꾸었다. 컵라면 뚜껑에 표기한 영어 상표에도 ‘CAP’과 ‘TEEN’을 다른 색깔로 디자인해 10대를 겨냥한 제품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했다.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캡이야’라는 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 상표가 ‘10대가 최고’로 꼽는 제품이라는 중의적 효과를 노렸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최근 들어 캐주얼 의류나 가방·액세서리 따위를 생산하는 토털 패션업체들은, 새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어떻게 하면 10대에게 호감을 살 상표를 붙일 수 있을지 궁리한다. 덕분에 상표 이름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브랜드 네이밍 업체들에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브랜드 네이밍 업체인 이름고을 양문성 부사장은 “패션업체들의 주문은 한마디로 조금이라도 더 튀게 해 달라는 것으로 요약된다”라고 말했다. 주문자들의 요구가 일단 튀게 해달라는 것인 만큼, 이렇게 해서 나온 10대용 상표들은 말 그대로 요지경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기를 끄는 것은 토속어를 이용한 상표들이다. 지피지기(zippyziggy)처럼 한자 성어와 영어를 절묘하게 결합한 이름도 눈에 띄고, 놈(NOM)이나 지지배(ZIZIBE), 배드 보이(Bad Boy)처럼 비속어를 그대로 사용한 이름들도 있다.

쌈지(SSAMZIE)나 십이지(十二支)처럼 고어에서 착안한 것도 적지 않다. 특히 주머니를 뜻하는 토속어 쌈지는 핸드백 같은 잡화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착안한 상표인데,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즈려밟고’라는 신발이 한때 크게 유행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튀는 상표들은 특이한 것을 좋아하고 자기들만의 문화를 꿈꾸는 10대의 취향과 맞물려, 최근 서울 신촌과 압구정동·상계동 일대 청소년 시장을 빠른 속도로 파고들고 있다.

10대들, 길고 우아한 상표 질색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10대 청소년들을 고객으로 삼기 위해 문을 연 한신코아 노원점의 10대 매장 ‘매직 존’은 주로 중·저가 의류들을 파는 곳이다. 이른바 동대문 상권을 주름잡는 상표들이다. 이 매장에서 10대를 향해 손짓하는 상표는 최신 유행어에 더욱 민감하다. ‘최고’라는 뜻의 10대 은어인 ‘짱’이나, 개그맨 서경석이 놀라운 일을 당할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혀를 내밀면서 유행시킨 ‘뜨아’ 같은 비속어가 곧바로 의류 상표로 둔갑했다. 또 의류 상표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털보’나 ‘보물찾기’ 같은 상표들도 눈에 띈다.

‘촌티’에 호소하는 이런 상표들을 제쳐놓고 나면 최근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짧으면서도 끊어서 읽기 좋은 것들이다. 10대들은 여성복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메르꼴레디’나 ‘베스띠벨리’처럼 길고 우아한 상표는 질색한다.

데뷔 초기 ‘핫’이라고 읽으면 구세대이고 ‘에쵸티’라고 읽으면 신세대라는 세대 구분법을 낳기도 했던 청소년 그룹 H.O.T.에서도 10대들은 유독‘끊어 읽기’스타일을 고집했다. 그 뒤를 이은 10대 연예인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S.E.S.도 그랬고 하마터면 ‘오빠’나 신을 뜻하는 ‘갓’으로 읽을 법한 ‘O.P.P.A’나 ‘G.O.D’ 같은 그룹 이름들도 10대들의 문법에서는 늘 ‘오피피에이’나 ‘지오디’로 읽혔다. 뜻보다 느낌·어감 좋은 이름 인기

10대들의 이런 끊어 읽기 선호 현상은, 발음이 겹치는 음을 피하는 것이 상표 이름을 짓는 기본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페르진(Ferre Jeans)’이라는 청바지는 이런 경향을 따라가다 보니 ‘제이’자가 연달아 겹치는데도 ‘에프알제이진(FRJ Jeans)’으로 이름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상표가 갖는 자산 가치를 컨설팅해 주는 ‘브랜드 밸류’김형남 사장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10대들의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10대들은 디지털 문화 세대이다. 디지털은 0 아니면 1이라는 이진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중간 지점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10대들이 이런 상표를 선호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분절적 사고에 길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재미있다’를 ‘잼있다’로 줄여 말하기를 즐기는가 하면, ‘어서 와요’를 ‘어솨’로, ‘반가워요’를 ‘방가’로 표현하는 통신 언어 세대의 특성을 감안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분석이다.

또 과거에는 상표 이름을 지을 때 의미를 먼저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의미와 관계없이 발음이나 느낌만으로 짓는 경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아무런 뜻도 없이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뜻하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들을 따서 ‘로이즈 비브’라고 지은 브랜드도 있고, ‘롤롤’ ‘암야민’처럼 아무 의미 없는 음절들을 모아 놓은 것도 있다.

아예 어떻게 읽어야 할지 헷갈리는 ‘XIX’ 같은 10대용 상표에 이르면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불필요해져 버린다. 생각해보라. ‘XIX’를 로마자로 판단해 ‘19’나 ‘나인틴’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알파벳으로 ‘엑스 아이 엑스’로 읽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이미 다른 상표에 고객을 빼앗길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이와 반대로 10대들에게는 여전히 이 암호와도 같은 ‘XIX’상표가 충분히 먹혀들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물론 콜라 뚜껑을 딸 때 나는 소리를 응용한 펩시(PEPSI)나,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나는 소리에서 착안한 코닥(Kodak)처럼 발음 자체에 주목하는 것은 브랜드 네이밍에서는 고전에 속한다.

그러나 최근 10대들이 선호하는 상표들은 이처럼 소리 느낌과도 별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특이한 발성이라도 또래 집단끼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또래 집단을 중요시하는 경향은 지난 2월 국내 시장에 선보인 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힙합 패션 상표인 FUBU에서도 나타난다.

이 상표는 애초 미국의 한 흑인 디자이너가 개발한 것을, 삼성물산 미주법인이 상품성에 착안해 합작 투자를 통해 미국 시장을 장악한 뒤 국내에 다시 들여왔다. 힙합 문화를 나타내는 말답게 FUBU는 ‘For Us By Us’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만든다’는 이 공동체 정서는, 10대들을 향한 힙합 마케팅의 기본이 되는 셈이다.

이 상표로 미국 시장에서만 3천개 넘게 매장을 내는 등 ‘대박’을 터뜨린 삼성물산 관계자는 “국내 시장에 FUBU 상표를 단 제품이 상륙하기 전에 이미 압구정동에서 한 장에 30만원이 넘는 티셔츠가 거래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흑인 스포츠 스타들이 이 상표를 단 제품을 입은 모습을 텔레비전이나 잡지를 통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수출품 OEM 방식 극복하는 초석 될 듯

수입 업자도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사이에 10대들은 나름으로 ‘우리 의식’을 발휘해, 이 상표를 ‘달고’ 있는 미국의 마이클 조던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0대들을 겨냥한 새 상표 바람은 한국 수출품들이 생산만 할 뿐 자체 상표를 붙이지 못하는 주문자 상표 부착(OEM) 방식을 극복하고, 독자 상표를 개발해 가는 초석이 될 것이 분명하다.

10대 소녀를 부르는 우리말 속어인 지지배(ZIZIBE)라는 상표로 출시한 의류가, 일본과 홍콩의 10대 소녀들에게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의미보다는 어감이나 발음으로 선택한 상표가 일단 동양권에서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니(SONY)가 성공한 데는 고집스런 독자 상표 전략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한 이 회사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는 총자본의 몇 배에 해당하는 외국 업체의 주문을 받고도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으로는 응하지 않겠다고 고집스레 버티면서 오늘의 소니를 이루어냈다. 상표의 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교과서처럼 되새겨야 할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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