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복병/수출 전선에 먹구름
  • 부산·朴在權 기자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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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복병은 무엇인가/악재 많아 2백억 달러 무역 흑자 달성 힘들 듯
크레인 기사 심포석씨(38)는 부산항 제5 부두에서 일한다. 경력 11년째인 그의 작업실은 지상 35m에 떠있는 반 평 남짓한 공간. 크레인 조종실에서 그는 배에서 트레일러로, 또는 트레일러에서 배로 컨테이너를 옮겨 싣는다. 3월11일 5부두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는 부지런히 배에서 컨테이너를 하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 작업에는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몇 가지 점이 있었다. 우선 2교대 근무인데도 실제 작업 시간은 5시간밖에 안되었다. 접안한 배의 크기도 너무 작았다. 원래 이 부두에는 해외로 나가는 5만t급 이상 대형 선박이 접안하도록 되어 있는데, 접안한 배는 만t급 연안 화물선이었다. 여기서 내리는 컨테이너도 20피트짜리가 아니라, 10피트짜리 소형이었다. 현장에서 작업하던 한 관계자는 “IMF 사태가 닥치지 않았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라고 말했다. 물동량이 줄다 보니 소형 선박까지 여기에 접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출 업체 34% “지난해보다 나빠질 것”

사실 2년 전만 해도 부산항의 최대 고민은 체선(滯船) 문제였다. 5부두를 예로 들면, 연간 시설 용량이 백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이지만 실제로는 1백83만TEU까지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배가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며칠씩 대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바로 옆에 감만·감천 부두가 문을 열기도 했지만, 물동량이 줄어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심씨는 “지난해 말부터 물동량이 늘고 있다. 한국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날 아침 언론 매체들이 대문짝만하게 보도한 ‘한국 수출 이상 있다’와는 대조되는 내용이었다. 이 날 언론들은 산업자원부 자료를 토대로, 지난 1∼2월 한국의 수출이 1백87억 달러인데,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7.2%가 줄었다고 보도했다. 한국금융연구원 최공필 박사는 “수출이 부진해 신용 등급이 다시 떨어지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라고까지 걱정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난 것일까. 핵심 이유는, 비교 대상이 되는 98년 1/4분기에 수출이 비정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전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쳐서 22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기업체들은 유휴 설비와 선박·항공기까지 내다 팔았다. 이렇게 해서 추가로 벌어들인 돈이 30억 달러였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모조리 내다 판 것이다. 이것은 산업 생산과는 무관하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올해 수출이 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면 2/4분기에 가 보아야 한다.그런 점에서 삼성물산의 구교형 경영기획팀 부장은 낙관적이다. 그는 “현재 추세대로 간다면 2/4분기에는 수출 증가율이 플러스로 돌아설 것이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얼마나 될 것이냐는 점이다. 구부장은 “절대로 많이 기대해서는 안된다. 기대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무역은 장사와 같다. 그런데 지금은 팔려는 사람만 있지 사려는 사람이 없는 형국이다. 따라서 팔기도 힘들고, 설사 판다고 해도 물건값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지난해 한국 상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수출 물량은 18%나 늘었는데도 수출 금액은 마이너스 2.8%를 기록했다. 그만큼 물건값이 떨어져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한 것이다.

하지만 경쟁국과 비교하면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외환 위기를 겪었던 태국의 수출 증가율이 마이너스 6.9%였고, 싱가포르(-12.0%)·대만(-9.4%)·일본(-8.6%)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국이 3백99억 달러 무역 흑자를 기록한 것도 세계적이다. 일본·독일·중국에 이어 세계 4위의 흑자 규모였던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한국이 2백억 달러 무역 흑자를 달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해의 절반 규모에 불과하지만, 환율이 대폭 절상되고 외환 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된 점을 감안하면 그리 만만한 목표가 아니다. 지난 11일 산업자원부가 밝힌 해외 시장 동향이 이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장기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과, 최악의 상황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동아시아를 제외하면, 여타 지역은 하나같이 구매력이 줄고 있다. 중동 지역은 국제 원유가가 하락해 달러 부족 현상이 심각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지난 2개월간 중동 국가들의 수출이 13%나 줄었다.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과 중남미 사정도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경기가 나빠지자 각국은 하나같이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세계에 공급 과잉 문제가 생기고 단가도 하락하고 있다. 국내 수출 업체들로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최근 한국무역협회가 2백82개 수출업체를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보도가 넘쳐나지만, 정작 기업체들은 올해 경제가 지난해와 비슷하거나(44%) 나빠질 것(34%)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들이 꼽는 애로 요인은 △원화 강세 △경쟁국과의 경쟁 격화 △국내 업체간 과당 경쟁 △주요 시장의 경기 침체이다.

반도체에 의존하는 수출도 불안 요인

그 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것이 원화 강세이다. 환율이 떨어지면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하고, 금리가 떨어지면 채산성이 개선되는 것이 상식이다. 무역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환율이 1천1백80원이 되면 기업의 채산성은 20조7천억원 악화하고, 금리가 10.8%로 떨어지면 채산성이 10조5천억원 개선된다. 종합해 보면, 지난해와 비교할 때 올해 채산성 악화 규모가 10조2천억원이나 되는 것이다. 최근에 금리가 예상보다 크게 떨어져 기업들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지만, 지난해 수출 기업들이 환율로 덕 본 만큼 덕을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따라서 수출 주력 기업들에는 올해가 더 어려운 한 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경기 회복에 악재가 분명하다.최근 수출이 일부 업종에 국한한다는 점도 불안 요인이다. 반도체와 정보통신 기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업종은 크게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선박 수출에는 별다른 변동이 없지만, 철강·석유화학 제품은 지금도 값이 떨어지고 있다. 기아자동차가 정상 가동됨으로써 자동차 수출이 늘고 있지만, 획기적인 채산성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다. 한국은행 조사부 박영수 조사역은 “현재의 수출 신장세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반도체 거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반도체에 의존하는 수출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반도체는 세대 교체 과정에서 가격이 폭락하는 등 단기적으로 경기가 불안정하다. 또 산업 전반에 미치는 효과가 미미하다. 즉 반도체 경기가 살아난다고 해도, 전후방 연관 효과를 기대하기가 힘든 것이다.

게다가 대외 여건도 여전히 불안하다. 가장 큰 변수는 엔화 가치 하락이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1백30 엔을 넘어설 경우, 해외 시장에서 국산품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원/엔 환율이 10 대 1은 되어야 한다고 보고, 원/달러 환율도 1천3백원 대 1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위안화 평가 절하 가능성이다. 중국 당국이 끊임없이 절하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전문가들도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국영 기업과 금융 부실이 심해져 중국 정부를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수출이 회복세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구교형 부장은 이를 두고,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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