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경제 지표에 속고 있다
  • 샌프란시스코·南裕喆 편집위원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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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총생산 증가에도 실질 소득은 감소… 모순 밝혀낼 ‘실질진보지수’ 등장
극단적인 보수 성향으로 명성이 자자한 패트릭 부캐넌 미국 대통령 후보가 최근 격조 높은 공익 방송(PBS) 채널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 <짐 레어러와의 뉴스 시간>에 초대돼 화제를 모았다. 그는 계속되는 여론조사에서 유력한 공화당 대선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필 그램 상원의원을 따돌리고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봅 돌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를 추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이 되면 무슨 일을 제일 먼저 하겠느냐’는 질문에 부캐넌은 대통령의 특별 권한을 발동해 세 가지 정책을 즉각 시행하겠다고 답했다. “우선 미국을 분열시키는 이민을 중단시키고, 세금을 대폭 줄이며, 미국 경제를 갉아먹는 자유무역을 즉각 중단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무역 적자의 70%를 차지하는 일본과 중국에 대해 각기 10%와 20%의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밝혔다. 중국은 동북아는 물론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일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부캐넌은 자동차 시장이 폐쇄되어 있다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미국 시장을 폐쇄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클린턴 대통령을 “신국제질서라는 이름의 제단에 미국의 안보와 국익을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부캐넌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은 명백히 미국 헌법에 위반되므로 대통령이 되는 즉시 탈퇴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기까지 했다. 내일 당장 미국이 유엔에서 탈퇴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감히 누가 우리에게 덤비겠느냐’는 것이 그의 스스럼 없는‘미국 최우선’논리이다.

미국에서 최고의 신뢰를 받고 있는 공익 방송이 부캐넌의 선동적 주장을 심각한 논조로 소개한 것은, 최근 미국의 엘리트 언론들이 하나 둘 부캐넌에 대한 보도 태도를 바꾸어 가고 있는 경향과도 일치한다. ‘보수주의의 광대’로 희화화됐던 몇년 전과 달리 진짜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주류 정치인의 하나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부캐넌의 주장을 단순히 난센스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많은 미국 유권자들이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황금기, 체감상으로는 빙하기

미국인들이 최근 수년간 피부로 느끼는 경제 현실(미국적 기준이기는 하지만)은 사실 힘들고 고통스럽다. 대규모 기업 합병과 매수가 이루어질 때마다 엄청난 일자리가 ‘효율적 경영’을 위해 사라진다. 게다가 미국 중산층의 실질 수입은 몇년째 계속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부캐넌은 분노하는 미국 중산층에게 그들이 분노해야 할 구체적인 ‘희생양’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상승 가도를 달려 왔다. 미국인들이 최근의 경제후퇴에 과민한 분노와 좌절을 보이는 것도 그만큼 그들이 생활 수준 하락에 익숙지 않기 때문이다. 4년이 넘는 불황에 지쳐 부시 대통령을 갈아치웠으나, 클린턴이 백악관에 입성한 이후에도 경제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 대다수 미국인의 반응이다. 오히려 거리에서 만나는 보통 미국인들은 한결같이 경제 현실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고 불평한다. 지난 총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한 이변도 국민의 경제적 좌절과 분노가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수그러들지 않는 미국 국민의 분노를 경제학적으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지표로 나타나는 미국 경제에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표 경제와 일반인이 느끼는 체감 경제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미국 정치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미국 국민의 분노는 경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간극의 차이를 넘어서고 있다.

미국 경제는 클린턴이 집권한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다수 미국인은 아직도 불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지표 어디를 들여다보아도 현재 미국 경제는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인들이 경제 황금기라며 그리워하는 레이건 대통령 8년 집권기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2.8%였는데, 클린턴이 집권한 이후 미국 경제는 그보다 더 높은 연평균 3.3%의 성장률을 지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클린턴이 경제를 살렸다고 생각하는 미국 유권자는 없어 보인다.

올해 2/4분기까지 미국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3.2%로 독일이나 일본보다 훨씬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실업률이 5.6%까지 내려가 기록적인 취업률을 보이고 있다(미국 경제학자들은 실업률 5.5%를 사실상의 완전 고용으로 간주한다). 게다가 90년 이후 일본의 주가가 50%나 하락한 데 반해 미국의 주가는 75%나 상승했고, 기업들의 수익도 급상승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투자는 늘고 무역 적자는 줄고 있으며, 컴퓨터에서 생명공학에 이르는 거의 모든 첨단산업에서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제조업에서도 미국은 일본이나 독일에 비해 10~20%나 높은 생산성을 보이고 있고, 그 차이가 서비스업에서는 50%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스위스에서 발간되는 세계 국가경쟁력 보고서가 확인하고 있듯이 미국의 경제력은 확고한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통 경제학 무용론’ 대두

이렇게 모든 경제지표가 파란 신호를 보이고 있는데도 왜 대다수 미국인은 미국 경제가 급속히 쇠락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최근 지표 경제와 체감 경제 간의 차이가 상식적인 설명을 넘어서리만큼 커지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전통 경제학 무용론’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언론의 과장 보도가 소비자의 심리를 더 위축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인정하는 한 가지 사실은, 경제를 피부로 직접 느끼는 일반 대중의 체감 경제가 의외로 정확하다는 점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는 비영리 공공정책 연구기관인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는 최근 미국의 경제 현실과 지표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국내총생산(GDP)을 경제성장의 지표로 맹신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주장해 학계와 정치권에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창립된 지 2년 남짓한 이 연구기관의 세 공동 대표는 최근 미국의 대표적인 여론지인 <애틀랜틱 먼스리> 10월호에 ‘미국 경제가 상승하고 있다면 왜 미국은 쇠락하고 있는가’라는 커버 스토리 기고문에서, 현재 경제성장의 지표로 사용되고 있는 국내총생산이 미국 경제의 실상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해 미국 여론의 눈길을 끌었다.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 공동 대표인 조너선 로우 박사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성장을 나타내는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이나 국민총생산(GNP)은 경제 활동의 일부분만을 반영하는 데다 특히 범죄나 마약 거래와 같은 사회적 해악을 경제성장으로 계산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87쪽 인터뷰 참조).
GDP 지수로는 ‘이혼 증가=경제성장’

그는 “특정 경제 활동이 사회와 국가에 미치는 사회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화폐 교환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경제 활동의 생산 총량만을 측정하는 국내총생산이나 국민총생산 지표는 더 이상 미국 경제의 실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국내총생산은 경제 주체의 국적에 상관없이 한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경제 활동의 총량을 의미하고 국민총생산은 한 국가의 경제 주체가 국내외에서 생산한 총량을 의미한다. 80년대 이후 외국인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유엔은 국민총생산 대신 국내총생산을 경제성장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올해부터 국민총생산에서 국내총생산으로 지표를 수정했다).

국내총생산이나 국민총생산은 화폐 가치로 교환되는 경제 활동만을 경제 생산으로 측정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흔히 지적되는 대표적인 한계 가운데 하나가 가정 주부의 가사 노동을 국내총생산이나 국민총생산에는 경제 활동으로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34년 국가의 부를 측정할 지표가 필요하다는 미국 의회의 요청으로 국민총생산 지표를 처음 만든 미국 경제학자 사이몬 쿠즈네츠도 자기가 만든 지표가 안고 있는 한계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의회에 내놓은 첫 보고서에서 ‘이 지표가 특히 경제성장의 질을 측정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라’고 강조했다.

환경주의자들은, 석유를 채굴하거나 나무를 베는 환경 파괴 행위도 쿠즈네츠의 지표에는 단순히 ‘경제성장’으로 나타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환경 파괴는 시간이 지난 후 더 큰 경제적 손실로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는 나아가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사회 비용’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비판을 덧붙인다. 가령 미국에 만연한 이혼 증가도 국내총생산 지표에는 경제성장으로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이혼을 하면 관련된 변호사와 카운셀러들이 돈을 벌게 되는데, 그것이 경제성장으로 둔갑하게 된다. 가정 붕괴가 어떻게 국가의 경제 이익으로 계산될 수 있는가.”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가 국내총생산 대신으로 고안한 지표는 실질진보지수(Genuine Progress Indicator)라는 것이다. 이 지수는 경제 활동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전통적으로 계상되지 않았던 가사 노동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특히 범죄와 이혼 같은 이른바 ‘사회 비용’을 일정한 금액으로 환산해 총생산에서 빼도록 공식을 설정했다. 예를 들어 이혼 건수가 하나 늘어나면 총생산에서 1만2천5백달러를 빼도록 설정해 놓았다. 로우 박사는 여러 가지 자료를 참조해 이혼하는 데 드는 비용 5천달러와 그로 인해 어린이들이 받는 부정적 영향을 7천5백달러로 계산해 합계 1만2천5백달러를 마이너스 요인으로 계상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로우 박사는 현재 미국 경제의 성장은 극소수 고소득 계층에게 그 혜택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미국인이 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을 실감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국내총생산 지표가 이러한 국민의 소득 불균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표 경제와 체감 경제와의 간극이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에 반해 실질진보지수는 소득 불균형을 반영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83~93년 10년간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55%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실질 임금은 오히려 14%나 하락했다. “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성장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극대화시켰지만 전통적인 지표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 의식을 가지지 않았다”고 로우 박사는 주장했다. 미국의 인구조사통계국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88년 미국의 가구당 평균 소득은 4만1천4백72달러였으나 91년에는 (국내총생산의 증가, 즉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3만6천6백23달러로 무려 12%나 하락했다.
세계 경제 뒤흔들 ‘보수 태풍’ 닥칠 수도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가 만든 실질진보지수로 측정한 미국 경제의 성장률을 보면, 50년대 이후 계속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국내총생산 지표와 달리 미국 경제는 70년대를 정점으로 하여 계속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85쪽 도표 참조). 특히 90년대 들어 급속히 쇠락하고 있음이 실질진보지수로 확연히 드러난다. 로우 박사는 “실질진보지수가 미국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미국 경제의 진정한 실상을 반영하고 있음은 도표 하나로 분명히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띤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 같은 연구기관이나 학자들이 내놓은 ‘미국 경제의 미스터리’에 대한 해명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이나 정치인 그리고 언론인들은 국내총생산이 증가하는 것을 경제적 ‘진보’로 착각할지 몰라도 경제 전문가들은 국내총생산 지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 반면 리디파이닝 프로그레스가 만든 실질진보지수는 정치·사회적으로 국가의 방향을 특정 가치관에 맞추어 이끄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경제학적 수단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는 지표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90년대 들어 미국의 생산성은 80년대의 연평균 0.9%에서 2.2%로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연평균 9%가 넘어가는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 같은 아시아 개도국들의 생산성은 지난 10년간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경제의 질적 도약으로 인한 국민의 생활 수준 향상이 근본적으로 생산성 향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대다수 정통 경제학자들은 미국 경제의 미래를 여전히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첨단산업으로 구조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중산층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나, 이는 구조 조정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케빈 머피 교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입되면 초기에는 더 나은 교육을 받은 노동자가 빨리 적응하고 더 많은 혜택을 독점적으로 누리게 된다. 하지만 머지 않아 모든 사람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되면 초기에 소수가 누렸던 지식 프리미엄은 사라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경제 역사적으로 생산성 증가가 있으면 반드시 실질 임금 증가가 뒤따랐다는 점에서 미국인들의 실질 소득이 곧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다만 그 시간 차가 얼마나 길어질 것인가가 주요한 정치·경제학적 과제로 남는다. 만약 그 시간이 미국 유권자들이 인내할 수 있는 이상으로 길어질 때, 한국은 물론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미국의 ‘보수 혁명’은 극단적 보호무역론자인 부캐넌과 같은 정치인이 선봉의 깃발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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