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에 지하 비밀 기지 있다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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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시 정부 요인 천여 명 대피할 ‘B5 벙커’…수방사·종합청사와 연결돼
‘강당 천장이 열리면 로봇태권브이가 출동한다더라.’ ‘수영장 바닥이 갈라지면 핵 미사일이 나온대.’ 캠퍼스 규모가 제법 큰 대학에는 이런 황당한 전설 한두 개쯤은 전해오기 마련이다. 어디엔가 비밀 기지가 숨어있다는 믿음은, 여자 고등학교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만큼이나 시대를 넘어서 구전된다. 물론 대부분 ‘뻥’이다.

그런데 최근 서울대에서 내려오던 괴소문 하나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밝혀졌다. 학생들이 주장해온 ‘비밀기지설’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 요인 천여 명이 유사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비밀 중의 비밀 벙커가 실제로 대학 캠퍼스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이 국가 기밀이 들통 나는 단초가 된 것은 서울대 일부 교수들의 ‘용기’였다. 1월7일 강창순 교수(원자핵공학과)를 비롯한 서울대 교수 7명은 ‘원전 수거물 관리 시설 사업을 서울대학교 부지 내 관악산에 유치하자’고 건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서울대 교수 63명이 공동 서명했다는 이 제안이 있은 후 관악구청을 비롯한 지역 단체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서 파문이 확산되었다.

교수들이 하필 서울대를 원전수거물 저장소로 꼽게 된 데는 나름의 뒷이야기가 있다. 원래 성명서에는 ‘이미 서울대에는 원전수거물을 저장할 만한 지하 시설이 있다’는 부분이 있었다. 이 문장은 기자들에게 배포하기 직전 삭제되었으나 기자회견 도중 강창순 교수가 지하 동굴을 언급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구체적으로 따져 묻자 강교수는 동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학교에 널리 퍼진 소문이라고만 답했다.

서울대에 정체 불명의 비밀 지하 동굴이 있다는 소문은 3~4년 전부터 학교 안팎에서 무성했다. 그러나 이 의문에 누구도 속시원히 답해주지 않았다. 서울대 지하에 정말 비밀 시설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마징가제트’ 이야기처럼 황당한 유언비어일까? 서울대 황우석 교수는 “20년 가까이 서울대에서 지냈지만 진실을 알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기자가 확인해 본 결과 이 동굴의 정체는 다름아닌 대한민국 정부의 시설 B5(Bunker 5) 지하 지휘소였다. 유사시 정부 내각 요인들이 바로 이곳으로 대피하기로 되어 있다. 벙커는 무려 천여 명이 들어가 몇 달 간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B5 벙커에 출입한 적이 있다는 이 아무개씨(50대)는 이렇게 증언한다. “단체 버스 차량을 타고 서울대 정문을 지나 공대 뒤편까지 올라가니 은폐된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는 조그마했지만 내부는 아주 넓었다. 서울대 대운동장(5천평)의 절반만했다. 복도는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곳곳에 출입통제선이 있어서 끝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1월9일 기자는 문제의 벙커 입구를 탐문해 보았다. 입구 정면은 위장 나무로 가려 있었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표지만 보였다. 소리 없이 접근했는데 어느새 요원들이 나와 길을 막았다. 출입구 위에 CCTV 2개가 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원은 “이곳은 기밀 시설이다. 들어갈 수 없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동굴의 용도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그냥 문서 보관소다. 더 알려고 하지 말라”고 답했다.

이 벙커는 현재 을지포커스와 같은 훈련 때만 지휘소로 쓴다. B1, B2 벙커가 주로 군인들이 쓰는 것과 달리 이 벙커는 정부 공무원용이다. 내부에는 여우굴처럼 복잡한 통로가 있는데, 남으로는 관악산 건너 과천종합청사와 연결되며, 동으로는 수도방위사령부 벙커와도 연결된다. 유사시 강북 지역이 위험해지면 청와대도 한강을 넘어 이곳으로 피신한다고 한다.

벙커가 서울대 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 서울대 시설노조위원장 홍 아무개씨는 “서울대에서 시설 관리를 하다 보니 지하 곳곳에 공기 구멍 같은 통로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번은 학교 본부 정문을 가로막고 파업 시위를 벌였는데 본부 간부들이 이 지하 터널로 빠져나가 허탈했다”라고 회고했다. 홍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군 공습을 피하기 위해 만든 지하 시설이 노조 파업 피신용으로 요긴하게 쓰였던 셈이다.

군사 기밀이라지만 근래 들어 벙커의 보안은 유지되지 않고 있었다. 최근 서울대가 관악산 난개발을 계속하는 바람에, 벙커 입구 주변에 주차장과 신축 건물이 들어서고, 수시로 통학 버스가 다닌다. 이렇게 학생들의 왕래가 빈번하자 ‘서울대에 이상한 동굴이 있다’는 괴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서울대 B5 벙커 외에도 전국 곳곳에 숨겨진 벙커가 많다. 그 중 몇몇은 전략적 의미가 퇴색해 무용지물로 전락하기도 했다. 계룡산 천왕봉 벙커가 그랬다. 1972년 군이 산 정상 부근에 178㎡에 달하는 지하 벙커를 만들었으나 1984년 폐기한 후 2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 2003년 5월에야 시민·환경 단체들의 탄원으로 겨우 원상 복구되었다.
서울대 B5 벙커도 혹시 전략적 가치가 없어져 원전센터 수거물 저장용 창고로 변신할 수 있을까? 이 벙커의 평시 관리를 맡고 있는 행정자치부 김원석 비상계획담당관은 “서울대 교수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안한 것이다. 기밀이어서 구체적인 사항을 말할 수는 없지만, 훈련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특정 용도로 쓰고 있기 때문에 절대 원전수거물 저장소로 변용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원자탄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서울대 지하 벙커가 역설적으로 원자력수거물 저장소 후보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교수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1월8일 서울대 정문에서는 민주노동당 관악지구당과 서울대 환경동아리 학생들이 원전센터 유치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어떻게 주민과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할 수 있나. 관악산이 자기들 것인가?”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부가 관악산에 군사 기지를 뚝딱 만들 때와는 분명 다른 시대라는 점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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