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 보금자리 열린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7.05.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민족복지재단, 전북 장수에 정착촌 ‘고향 마을’ 건립
전북 장수군 두메 산골에 탈북자를 위한 집단 정착촌이 들어선다. 이르면 오는 9월 1차 공사를 끝내고 입주자를 받아들일 이 정착촌에 붙여진 이름은‘고향 마을’이다. 혈혈 단신으로 북한을 탈출해 혈육 없이 외롭게 지내기 마련인 북한 이탈 주민들, 이른바‘보통 탈북자’들에게 서로가 의지해 가며 정을 붙일 장소를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고향 마을은 이름에서 풍기는 것처럼 정서적 목적으로만 설립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중요한 설립 목적은 정치·사회 체제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귀순해와 한국 사회에서 문화적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탈북자들에게 사회 적응 교육을 실시하고, 경제 기반도 제공하여 이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돕는다는 것이다.

정부·민간 통틀어 탈북자 정착촌으로는 맨 먼저 선보이게 될 고향 마을 건설은 약 6개월 전 서울영동교회(박은조 담임 목사)가 부지 약 11만4천평을 재단 이름으로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서울영동교회는 이미 6~7년 전부터 고향 마을이 들어설 전북 장수군 내에 5만평 규모의 땅을 확보해 장애인들을 위한 벧엘농장(전북 장수군 계북면)을 운영해오던 터였다. 박목사는 부지를 매입할 당시 기존 벧엘농장을 확장해 좀 더 큰 규모의 장애인 자활 농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다(오른쪽 인터뷰 참조).

이 무렵 몇년째 계속된 홍수 탓에 극심한 식량난이 발생한 북한에서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하고, 그 중 일부가 다시 한국으로 건너오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에 먼저 귀순한 사람들 중 일부는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해 천신만고 끝에 찾은 자유의 품을 등지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제3국으로 빠져나가려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북한 주민의 대량 탈북 사태에 걸맞는 탈북자 정책 수립과, 기존 탈북자 사회 적응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시급한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94년 한국에 귀순했다가 2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96년 재입북을 시도한 김형덕씨 사례는 대표적이다. 북한 자강도 희천시 출신으로 한 차례 탈출 시도가 좌절되어 북한에서 수용소 생활까지 경험했던 김씨가 꿈에 그리던 자유의 땅을 다시 등지려 했던 일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유는 탈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매몰찬 눈길과 당국의 무관심, 그리고 본인의 사회 적응 능력 부족이었다. 김씨는 정상이 참작되어 다행히 재판에서 집행 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탈북자 정착 문제가 더욱 크게 불거졌다.
협동농장식 운영… 과일과 축산물 생산 계획

이같은 일들이 잇달아 벌어지자,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한 서울영동교회측은 자기네가 매입한 땅에 장애인 자활 농장을 세우겠다는 당초 계획을 바꿔 탈북자 정착촌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해외 선교 사업과 장애인·탈북자 사역을 목표로 설립한 한민족복지재단에 내놓았다.

부지 현황을 파악하고 마을 입지를 검토하는 등 구체적인 작업은 올해 들어 본격 추진되었다. 지난 1월 한민족복지재단 김형석 사무총장이 주도해 재단 실무자들이 현지 답사를 벌이고, 관할 행정 당국의 협조를 구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향 마을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할 것인가 하는 논의와, 탈북자들을 개별 면담해 참여를 설득하는 작업도 병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안이 고향 마을을 협동 농장의 모범 사례로 알려진 이스라엘 모샤브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모샤브는 참여자들에게 농장 안의 땅 사용권을 인정해 주고, 생산물의 개인 소유도 보장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고향 마을 건립 계획서’에 따르면, 최초 20명 정도의 입주자들로 출발할 정착촌의 주요 생산 품목은 사과·포도·배·호도 같은 과수와, 소·돼지·닭을 비롯한 축산물이다. 아직 산골 깊숙이 자리잡은 황무지에 불과하지만 4인 가족 기준 15평, 3인 기준 12평 안팎 단독 주택과 공회당·공동 창고·강당 및 생활관 따위 공공 시설이 들어서는 오는 9월께면 고향 마을은 명실 상부한 탈북자 정착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고향 마을은 탈북자들의 자립 기반을 제공하는 데 1차 목표를 두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탈북자들의 사회 적응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일 생각이다. 전문가들을 끌어들여 사회 적응 교육과 인성 교육도 병행한다는 것이다. 재단측은 이를 위해 이미 김영수(제주대·국민윤리)·김종인(나사렛대·재활학)·이장호(서울대·심리학)·전우택(연세의대·정신과) 교수 등 각계 전문가들을 섭외해 각 부문을 맡겼다.

“막대한 비용 국민이 도와줘야 성공”

기껏해야 정착금 몇푼 쥐어준 뒤 당사자의 특기와 능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직장을 알선함으로써 무방비 상태의 탈북자들을 자본주의 체제로 내모는 정부의 정착 대책에 비추어볼 때, 단계적 사회 적응 프로그램까지 꼼꼼히 준비하는 고향 마을 사례는 앞으로 탈북자 문제 해결에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민족복지재단 조득남 실장은 “탈북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이는 편견이다. 사실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거나 체계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해 왔다. 이런 면에서 고향 마을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한민족복지재단측은 앞으로 3~4년 간을 과도기로 생각하고 있다. 고향 마을을 일단 ‘정착 훈련원’ 형식으로 운영한 뒤 일정한 성과가 있으면 농지와 농가를 입주자들에게 불하해 본격적으로 정착촌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계획이 성안 단계에 이를 때까지 사업 내용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신중한 자세를 보여온 김형석 사무총장은 “초기 단계에 들어갈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가 진짜 문제다. 5월부터 기금 모금을 대대적으로 할 생각이지만, 관건은 국민들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다.

해마다 50여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귀순하고, 북한 주민의 대량 탈북 사태에 속도가 붙고 있어 고향 마을에서 이루어질 탈북자 정착 실험은 앞으로 더욱 큰 사회적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