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대북 전선’ 이상 없다?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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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안기부와 북한 보위부의 중추 세력은 공작원이 아니라 분석관이다. 남북 첩보전의 핵심은 이들 분석관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싸움이다.
휴전 협정으로 총성이 멎은 지 54년. 군사분계선은 목책에서 철조망으로, 철조망에서 더 견고한 철책으로 바뀌면서 고착되어 왔으나, 남북 첩보전만은 활동 무대를 넓혀가며 확전 일로를 치닫고 있다. 이 싸움의 와중에서 극적으로 터져나온 것이 황장엽 비서 망명 사건이었다. 한반도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치열하게 전개되는 남북 첩보전의 세계를 추적해 본다.
북한 공작원 소탕 작전은 남북 첩보전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국에서 검거되는 북한 간첩을 분류해 보면 거개가 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이다. 92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거물 간첩 이선실과 95년 붙잡힌 부여 간첩 김동식(본명 이승철)이 바로 이곳 소속이었다. 반면 교수 간첩 깐수(본명 정수일)는 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이었다. 그밖에 노동당 통일전선부와 작전부도 공작원을 보내고 있다. 공작원을 보내는 노동당내 4개 부서를 관장하는 사람은 김용순 비서이다.

남파 공작원 5백~6백명이 고정 간첩의 핵심

한국으로 침투한 노동당 소속 공작원들은 친북한 인사를 접촉해 박헌영 이후 무너진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을 재건하는 일에 주력한다. 이선실이 만든 것이 지하 노동당이었고, 김동식 역시 같은 일을 추진하려고 했다. 암암리에 만들어둔 남로당은 유사시 세력을 규합해 봉기하고, 평시에는 첩보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선실·김동식의 경우에서처럼 이들은 ‘북에서 왔다’고 신분을 밝히고 활동하므로 첩보 활동보다는 지하 조직 구축에 더 전념한다고 볼 수가 있다.

최근 언론은 한국에 있는 북한의 고정 간첩이 4만∼5만명 정도 되리라고 보도했다. 고정 간첩 4만∼5만명 설은 10여 년 전부터 계속되어온 주장이다. 확인되지는 않지만 안기부 등에서는 지금까지 남로당에 가입했거나 노동당이 파견한 공작원을 접촉한 사람이 그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는 북한 공작원을 만난 것을 젊을 때의 열정으로 치부하고, 이후 관계를 끊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 공작원의 핵심은 5백∼6백명일 것으로 추정되는 남파 고정 간첩이다. 노동당 대남 조직은 이들이 한국에 동화되어 공작 활동을 포기할까 봐 ‘검열 간첩’까지 보내 특별 관리한다고 한다. 북한은 지하당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공작금을 쓴다. 이선실을 추적하는 단서가 된 김낙중 간첩 사건(92년) 때, 안기부는 김씨 집 뒤뜰에서만 백만달러를 발견했다. 2개월 동안의 단기 공작을 위해 내려온 김동식도 미화 6만5천달러, 한화 4백만원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당과 더불어 대남 활동을 하는 곳이 인민무력부(국방부에 해당) 산하 정찰국이다. 노동당 공작원이 포섭과 지하당 구축을 위주로 암약하는 데 비해, 정찰국은 군사 정찰과 폭파·테러를 위주로 활동한다. 정찰국이 일으킨 사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9월 일어난 강릉 침투 북한 잠수함 사건과 83년 일어난 버마 아웅산 사건이다.

김대식 상장이 이끄는 인민무력부 직속의 정찰국은 한국 전역을 대상으로 전략 정찰을 한다. 정찰국 요원은 잠수함을 이용해 부산항까지 침투해 사진을 찍어 간다고 한다. 전방에 배치된 군단에도 정찰대가 있다. 북한군 상좌 출신인 최주활씨의 증언에 따르면, 군단 정찰대는 전쟁 발발 때 예상되는 작전 지역을 대상으로 전술 정찰을 한다. 정찰국(대)은 정규군이기 때문에 이들이 침투할 경우 우리 쪽에서는 합참이 나서 군사적으로 대응한다. 침투 간첩에 대한 호칭 역시 공작원이라고 하지 않고 ‘공비’라고 부른다.

간첩 소탕 작전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만 이는 남북 첩보전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더 큰 첩보전은 소리 없이 교묘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교수 간첩 깐수는 84년 4월 한국에 들어온 뒤 무려 12년간 잠복해 활동했다. 깐수가 이처럼 오래 암약할 수 있었던 것은 지하당 구축을 위한 포섭 활동을 하지 않아 신분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53쪽 상자 기사 참조).

공작원 소탕과 함께 중요한 것이 친좌익 세력에 대한 감시이다. 특히 군에 입대한 친좌익 세력이 적과 내통한다면 유사시 중대·대대가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어, 기무사 등 군 방첩기관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공작원을 이용한 첩보 활동에는 고정 간첩을 전향시켜 역정보를 흘리는 경우도 있다. 역정보는 상대의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정보 전달 루트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자기 진영 내의 프락치를 잡아 내는 데 활용할 수도 있다.

공작원을 이용한 정보와 귀순자를 통해 얻는 정보를 인적 정보(HUMINT)라고 한다. 인적 정보는 매우 주관적이고, 역정보 등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안기부는 귀순자나 전향 간첩이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려고 과장 진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따라서 인적 정보는 정보로 인정하기에 앞서 매우 세심히 분석해야 한다.

인적 정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기술적 수단을 통한 정보이다. 여기에는 영상 정보(IMINT)와 신호 정보(SIGINT)가 있다. 영상 정보에는 사진 형태와 비디오 테이프 형태가 있는데, 주로 군 정보기관이 수집한다. 신호 정보는 통신 감청과 적 레이더 전파를 잡는 것과 같은 정보 활동으로, 역시 군 정보기관이 주로 담당한다.

영상 정보는 U2와 같은 고성능 첩보기나 인공 위성을 통해 적 지역을 사진 촬영하는 것인데, 한국군은 아직 이를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미 연합군의 구성원인 주한미군과 미군 태평양사령부로부터 관련 필름은 제공받고 있다. 사진 정보는 북한 깊숙한 곳에 있는 주요 시설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진 자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수년간 찍어온 동일 지역의 사진이 있어야 한다. 이 사진을 컴퓨터에 입력해 두고 새로 찍은 사진과 끊임 없이 비교하는 것이다. 또 구름 등 장애물이 있을 경우 이를 제거하는 시뮬레이션 기술도 갖춰야 한다. 지난해 6월 국방부가 영상 정보 장비 도입을 추진하면서 미국으로부터 북한 촬영 필름 수년치를 넘겨받고 관련 요원이 교육받기로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영상 정보 분야에서 북한은 미군보다 크게 뒤진 것으로 평가된다.

비디오형 정보는 무인 항공기(UAV)에 비디오 카메라를 장착해 적진을 촬영한 것이다. 첩보기나 인공위성이 적 지역 깊숙한 곳을 전략 정찰한다면, 무인 항공기는 단위 부대가 전투를 앞두고 적 부대의 움직임을 살펴보는 전술 정찰에 이용된다. 비디오형 정보는 회수되는 대로 판독 작업 없이 곧바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무인 항공기를 이용한 첩보 활동에 가장 앞선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미국도 최근 이 분야로 눈을 돌려 개발 중이고, 지난해 주한미군에 무인 항공기를 배치했다. 한국 역시 무인 항공기 분야의 중요성을 인정해 현재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국방위 국정감사장에서 군사 기밀 유출 시비가 붙었던 비조(飛鳥)사업이 그것이다.

안기부 핵심인 분석관, 석·박사 학위자 많아

통신(신호) 정보 수집에는 항공기를 이용한 수집과 전방 고지에 안테나를 세워 적 통신 주파수를 추적하는 방법이 있다. 현재 한반도에서 항공기를 이용해 통신 정보를 수집하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한국은 지난해 6월 통신 정보 수집용 항공기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전방 고지에 안테나를 설치해 적 전파를 감청하는 데는 한국군이 미군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주한미군에서는 미 8군 산하 501정보단과 별도로 국방부 지원단과 국방정보본부(DIA) 등이 나와서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 정보까지 수집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수집한 정보는 한국군이 채집한 정보와 교환되어 크로스 체크된다. 한국의 안기부와 군 정보기관이 확보한 인적 정보와 주한미군이 획득한 통신 및 영상 정보를 비교해 정확한 정보를 서로 나눠 갖는 것이다.

안기부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라 국내 다른 정보기관에 비해 월등히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자체 입수한 정보는 물론이고 각 군부대가 입수한 첩보와 주한미군이 입수한 정보까지도 확보해 종합·분석할 수 있다. 안기부와 대비되는 북한의 기관은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이다. 보위부는 인민무력부와 더불어 김정일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방위원회 직속 기구이다. 또 중국과 면한 국경 지대를 지키는 군사 조직도 따로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은 정보기관이 007 영화 속의 주인공 같은 공작원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안기부 직원 중에도 007이 되고 싶어 지원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기부의 중추 세력은 공작원이 아니라 분석관이다. 분석관은 북한의 각 분야를 맡아 수년간 분석해온 전문가인데, 국내외 대학에서 해당 분야를 공부해 석·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미국 영화 <붉은 10월>은 이러한 분석관을 주인공으로 한 흔치 않은 영화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미남이고 총도 잘 쏘지만, 실제 분석관은 구부정한 허리에 머리가 허연 학자풍이라고 한다. 황장엽 망명, 등소평 사망, 강성산 북한 총리 실각, 최 광 인민무력부장 사망 등 대형 사건이 연이어 터질 때 김정일이 어떠한 의사 결정을 내릴지 예측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이다.

분석관의 판단을 거친 정보는 대통령을 비롯한 안보 관계 주요 책임자에게 전달되어 북한 정책을 세우는 기초 자료가 된다. 남북 첩보전의 핵심은 안기부 분석관과 북한 보위부 분석관 간의 피 말리는 두뇌 싸움인 것이다.

“북한 내부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북한 정책에는 잠수함 사건과 같은 대형 사건이 터졌을 때 임기 응변으로 내놓는 것과, 개개 사건에 관계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북한 흔들기’가 있다. 북한 흔들기는 제3국에 나와 있는 북한 공관원을 대상으로 추진된다. 이들 공관원은 북한 내부 사정에 밝아 고급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터져 나온 성혜림·성혜랑 망명 사건과 최근 일어난 황장엽 망명 사건은 북한 흔들기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볼 수 있다.

북한 노동당 공작원이 이념을 기초로 공작하는 데 반해 우리의 북한 흔들기는 북한 경제 사정을 소재로 진행된다. 경제 피폐라는 큰 모순에 고민하는 북한 주요 인사의 고민을 이해해 줌으로써 심정적인 동조를 받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전은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최근 망명한 황장엽은 “남북 통일은 남한의 경제가 일본을 따라잡을 만큼 발전할 때 실현될 수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언론에 공개된 황장엽의 문건은 북한 권력 핵심부의 내부 사정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내부 싸움에서 밀려난 황장엽은 자신의 철학을 펼 공간을 바란 것 같다. 황장엽의 대리인인 김덕홍은 A씨라고 알려진 중개인에게 “우리의 제보는 민족과 조국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간첩 행위가 아니다. 황장엽 선생은 (북한) 망명 정부까지 구상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과 김덕홍의 이러한 언급은 김일성 사후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온건파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에 밀리는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교수 간첩 깐수의 진술에 따르면, 북한의 주요 인사는 한국에서 발행되는 각종 잡지와 신문을 읽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출판물에 실린 북한 관련 기사도 북한 흔들기로 활용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94년 김일성 사망 시기를 정확히 예측했던 무속인 심진송씨 관련 기사이다. 북한이 노동당 공작원을 직파해 좌파적 지식인과 학생 등을 포섭해 외곽에서 한국 흔들기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북한 권력 핵심부를 대상으로 흔들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94년 귀순한 강명도씨는 최근 실각한 강성산 북한 총리의 사위다. 로열 패밀리 출신으로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그가 귀순 후 펴낸 책 제목이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이다. 저서에서 강씨는 ‘김정일이 제한적인 개혁·개방을 시도하다 예기치 못한 암초에 좌초하면 해외 망명에 오를 공산이 크다’고 썼다. 강씨는 93년 10월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를 스위스에 보낸 것이 이 철(본명 이수용·스위스 주재 북한대사)이 관리하는 비밀 계좌와 망명처를 미리 둘러본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강씨는 평양 중심지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걸리는 곳에 있는 미림비행장에 90년 초부터 소형 일류신 여객기가 대기 중이라며, 쿠데타나 민중 봉기가 발생할 경우 김정일이 스위스로 망명할 가능성이 있다고 적고 있다. 만약 김정일이 망명한다면 남북 첩보전의 승자는 우리쪽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망명이 곧 남북 통일로 연결될지는 알 수 없다. 또 그 시기에 예견되는 혼란을 우리가 견뎌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안기부의 한 고위 간부는 “언론에 공개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회사는 북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북한에 급변이 생기면 주변국들이 가만히 있을 것인가. 성혜림·황장엽 사건에서 보듯 이미 남북한 문제는 주변 강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국제 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안기부는 북한 보위부와의 피나는 두뇌 싸움은 물론이고 김정일 정권 붕괴를 전후한 시기의 주변 국가 움직임까지도 계산에 넣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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