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육 상잔’ 딛고 <한국일보> 회생할까
  • 권은중 (jungk@sisapress.com)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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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구·장중호의 ‘장재국 제거’ 막전 막후
지난 1월29일 주주총회가 열린 한국일보사 7층 회장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날 주총은 정관 개정과 새 임원 선임을 위해 소집되었다. 하지만 주총의 진짜 목적은 <한국일보> 장재국 회장을 퇴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장회장은 사퇴를 거부하며 6시간을 버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주주이자 자신의 조카인 장중호 <일간 스포츠> 사장과 친형인 장재구 <서울 경제> 회장이 추진한 사퇴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해임안은 상정된 지 20분 만에 통과되었다. 대표이사로 있던 언론사주가 한국 언론 사상 최초로 주주총회에서 해임된 것이다. <한국일보>는 지난 2월1일 이사회를 열고 <서울 경제> 장재구 회장을 신임 <한국일보> 회장으로 선임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주총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한국일보>는 1996년부터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며 부채 규모가 4천5백억원에 이르러 언론사로서는 유일하게 화의 기업 명단에 올랐다(42쪽 상자 기사 참조). 따라서 사내에서는 장재국 회장이 부실 경영을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 구조 조정과 자산 매각 등 자구 노력이 부족하다는 채권단의 비판에 시달려 왔다.


장재국 회장은 직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지난해에만 노조가 두 번이나 파업했을 정도로 노사 관계도 악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장회장은 1996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미라지 호텔에서 1백86만 달러를 빌려 도박을 했다는 의혹마저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장회장은 사면초가였다.


장중호, 장재구에게 밀사 파견해 ‘동맹’ 맺어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장재국 회장 직속 기구인 <한국일보> 경영전략실 소속 중견 기자 2명이 무단 결근을 이유로 파면당했다. 두 사람은 회사에 알리지 않은 채 미국에 체류 중이던 장재구 회장을 찾아가 장재국 회장을 퇴진시키고 새로운 경영진을 꾸리자는 장중호 사장의 밀지를 전달했다. 장재구 회장은 동생인 장재국 회장을 밀어내자는 조카의 제안을 수락했다.


조카의 반란 조짐은 지난해 9월부터 엿보였다. 장중호 사장은 사장으로 취임한 후 비밀리에 실사한 결과를 토대로 <일간 스포츠> 광고국 직원 9명을 대기발령했다. 인사 대상자는 현직 이사급 본부장을 비롯해 부장급·과장급 등 전원이 간부였다. 이들은 대부분 장재국 회장 사람들로 알려졌다. <일간 스포츠>측은 구조 조정 차원이라고 했지만 사내 안팎에서는 경영권 다툼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큰 숙부와 조카가 작은 숙부를 몰아내기 위해 동맹한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일보>의 지분 분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국일보>의 주주는 모두 30여 명이고 최대 주주는 장중호 사장이다. 그는 지분 34.8%를 보유하고 있다. 또 창업주 고 장기영씨의 아들인 장재구·장재민·장재국·장재근 회장이 각각 9.4%씩 지분을 갖고 있다. 이들 가운데 국내파인 장재국·장재근 회장측과 미주 <한국일보>파인 장재구·장재민 회장이 한편으로 묶인다. 어느 쪽도 경영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51% 이상을 보유한 대주주가 없기 때문에 <한국일보>는 장중호 사장이 누구와 손을 잡느냐에 따라 경영권이 왔다갔다했다. 주총이 열리기 전까지 장중호 사장측과 장재국 회장측은 그런 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1대 주주인 장중호 사장과 장재구 회장이 손을 잡은 것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숙부 쪽에서 볼 때 미국 한인 사회에서 부동의 1위인 미주 <한국일보>가 살기 위해서는 본지가 탄탄해야 한다. 또 조카 처지에서는 <일간 스포츠> 주식의 51%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일보>의 경영 정상화가 절실했다. 또 <한국일보>로부터 독립해 사업을 확장할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음부터 뜻이 맞았던 것은 아니었다. 장중호 사장은 전에 자기가 <한국일보>를 소생시켜 보겠다며 삼촌에게 지원해 달라는 뜻을 전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재구 회장은 본인이 <한국일보>를 직접 경영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한국일보> 출신 원로들에 따르면, 장기영 창간 사주를 가장 빼닮았다는 말을 듣는 차남 장재구 회장은 1993년 장남인 장강재 회장(장중호 사장 아버지)이 죽자 자기가 형을 이어 아버지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주주인 장강재 회장 유족측은 장재구 회장을 탐탁치 않게 생각해 3남인 장재국 회장에게 경영을 맡겼다. 회사의 비전이나 경영 능력보다는 대주주의 이해 관계에 따라 회사 경영권이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장중호 사장은 이번에 야심가라는 평가를 받는 숙부와 손을 잡았다. 장재구 회장은 현재 2백억원인 <한국일보> 자본금을 6백억원으로 늘리는 증자에 단독으로 참여해 9.4%인 지분을 67%로 늘려 <한국일보>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될 예정이다. 1997년 경영에 실패한 장재국 회장의 뒤를 이어 <한국일보> 회장으로 취임했다가 대주주들의 견제로 1년 만에 물러났던 장회장이 4년 만에 <한국일보> 소유주로 금의환향하게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장중호 사장은 <일간 스포츠> 분사를 얻어냈다.


<일간 스포츠>는 지난해 7월 <한국일보>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양도대금 7백억원 가운데 3백억원을 지불하지 못했다. <일간 스포츠>는 지불하지 못한 대금을 주식으로 <한국일보>에 주었다. <일간 스포츠>가 지급한 주식은 자사 지분의 51%에 이른다. 그런데 이번 주총에서 <한국일보>가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포기해 <일간 스포츠>가 <한국일보> 계열사에서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간 스포츠>는 화의 상태인 <한국일보> 계열사로 있어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는 데 불리했다.


2월13일 설 연휴인데도 장재구 회장은 첫 출근을 해서 <한국일보> 각 부서를 돌았다. 그는 “창간 사주의 정신으로 돌아가겠다. 인적 청산과 구조 조정을 통해 회사를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장회장은 <한국일보> 노조와 기자협의회를 잇달아 만나 채권단의 실사가 끝나는 대로 <한국일보>를 어떻게 살릴지 청사진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경영권 분쟁 불씨 남아 미래 불투명




<한국일보> 직원들이 신임 장회장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구조 조정과 인적 청산이다. <한국일보> 관계자들에 따르면, 부실 경영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재빨리 줄을 서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한다. 장회장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한국일보> 회생의 시금석이라는 것이다. 편집국의 한 기자는 “경영자뿐만이 아니라 지면을 망친 편집자도 반드시 문책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국일보>는 2월18일 신상석 편집국장을 부사장으로, 최규식 경영전략실장을 편집국장으로 임명했다.


채권단은 일단 장회장 취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총부채가 4천억원인데 겨우 자본금 4백억원을 증자할 뿐이지만 직원들 사기를 끌어올리는 등 무형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주채권 은행인 한빛은행의 한 관계자는 장회장 취임이 3월 초 나올 실사 결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지만 장재구 회장 취임 이후가 순탄할 것 같지는 않다. 1993년 장강재 회장 사망 이후 말 많고 탈 많던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한국일보> 회장에서 해임된 장재국 회장은 여전히 <한국일보> 7층 회장실에 출근하고 있다. 회사측은 장재국 회장이 <소년한국일보>와 <코리아타임즈> 대표이사이기 때문에 출근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장재구 회장측은 시간이 지나면 장재국 회장이 물러날 것으로 보지만 장재국 회장이 거취를 결정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또 장재국 회장을 몰아내기 위해 손잡았던 장재구 회장과 장중호 사장이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 장회장이 <한국일보> 1대 주주가 되기 위해 장중호 사장과 어떤 이면 계약을 맺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먹기 따라서는 <일간 스포츠> 경영권까지 장회장에게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난 주총 때 <한국일보>가 보유한 <일간 스포츠> 지분 51%에 대한 의결권을 포기하기로 결정해 계열 분리가 되었다지만, 차후에 소집될 주총에서 이 결정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의 한 기자는 “두 사람의 공조가 깨지는 순간 경영권 싸움이 다시 불거질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일보>가 회생하는 데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간 스포츠>의 한 기자는 “아버지인 장기영 사주가 ‘신문은 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고 한 말처럼 장재구 회장이 사심을 버리고 창업주와 형님의 유업을 다시 일으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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