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정치’ 부활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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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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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연방안전국에 막강한 권한 부여…친위 세력 강화·대선 노린 포석
러시아 첩보 부문이 옛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KGB) 시대로 회귀할 조짐이다. 지난 3월11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국가보안위원회의 후신인 연방안전국(FSB)에 힘을 집중하는 것을 골자로 한 조직 개혁을 단행했다. 이같은 조직 정비를 통해 푸틴 대통령은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자웅을 겨루었던 국가보안위원회는 여러 개의 첩보 기관으로 쪼개졌다. 맨 처음 연방안전국·대외첩보국(SVR)·국경경비위원회(KOG)·행정관계위원회(KPS) 등 7개 독립 정보기관이 생겨났다. 이는 다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에 의해 개편되었다가, 1995년에는 또 한번 연방안전국·연방행정관계정보부(FAPSI)·연방국경국(FPS) 등 6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 조처로 인해 권한이 막강해진 연방안전국을 비롯해 4개로 재편된 것이다.

이같은 개혁은 이미 예상되었던 일이다. 16년간 국가보안국에서 근무하면서 첩보 문제를 손금 보듯 꿰뚫고 있던 푸틴이 2000년 대통령에 당선했을 때, 분석가들은 연방안전국 권한이 강화되고 첩보 계통의 푸틴 인맥이 정부 요직에 발탁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푸틴은 동료 세르게이 이바노프를 국방장관에, 연방안전국 중장 출신인 알렉산드르 즈다노비치를 국영 텔레비전 방송감독위원장에 임명했다.

하지만 푸틴도 조직을 함부로 개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지난해 가을 체첸 반군들에 의해 모스크바 극장을 피로 물들인 인질극이 터진 것이다. 이는 조직 개혁에 불을 당길 명분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첩보기관의 정보망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조직 혁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분위기가 무르익자 때를 기다려 온 푸틴 대통령은 칼을 뽑았다. 우선 옐친 전 대통령이 창설한 연방국경국을 해체하고, 이 기관의 권한을 연방안전국에 넘겼다. 또 연방행정관계정보국도 없애고, 이 기관의 권한을 연방안전국과 국방부에 나누어 맡겼다. 연방행정관계정보국은 전화 감청과 인터넷 통신 감시 그리고 은행 송금과 신용카드 추적 업무를 관장하는 독립 첩보 기관이었다. 이러한 개편의 요체는 파트루셰프 연방안전국 국장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는 것이었다.

연방안전국에 힘을 실어주는 동시에 행정 개혁도 단행했다. 우선 세무경찰청을 해체하는 대신, 불법적인 마약 유통을 통제하는 독립 기관으로 마약거래통제위원회를 신설했다. 세금 관할권은 내무부로 이양했다. 마약거래통제위원회는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유사한 조직이다. 또 연방행정관계정보국 해체로 빚어진 정보 공백은 국방부 내에 국가방위위원회(KGO)라는 독립 기관을 신설해 보완토록 했다.

이번 개혁으로 연방안전국·국방부·내무부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특히 연방안전국은 연방국경국의 출입국 관련 업무와 군 병력 21만명을 흡수하고, 연방행정관계정보국의 경제·언론에 관한 모니터링 권한까지 물려받았다. 이로써 국내 정치 문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첩보기관 개혁에 대한 평가는 찬반으로 갈리고 있다. 게나디 셀레즈뇨프 두마(하원) 의장은 “푸틴 대통령의 개혁은 시의 적절했다. 국경수비대와 첩보기관은 공공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 고위 관계자는 “푸틴의 개혁은 워싱턴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 문제를 전담하는 국토안전부를 신설한 것을 본떴다는 얘기다. 또 세르게이 유셴코프 러시아자유당 공동 의장은 “푸틴은 옛 소련 국가보안국 체제를 되살리고 싶어한다”라고 비꼬았다. 첩보 문제에 정통한 인터넷 통신 〈아겐투라〉의 편집위원 안드레이 솔다토프는 정보 통로가 일원화함으로써 정보의 신빙성을 확보할 길이 없어졌고, 첩보기관들의 상호 견제 기능이 사실상 사라짐에 따라 대통령이 연방안전국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정작 푸틴 대통령은 무엇을 의도했을까. 개혁안 발표 직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은 첩보 조직 정비가 필요한 까닭으로 ‘불법 마약 거래와 테러리즘 근절’을 들먹였다. 하지만 테러 방지와 마약 퇴치가 전부일까. 러시아 시사 주간지 <이토기>(종합)는 이번 개혁에 푸틴 대통령의 야심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며 후속 조처를 예견했다. 사실 이번 조처가 발표된 지 이틀이 지나 미하일 카시야노프 총리는 “행정 조직이 완전히 개편될 수도 있다”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이와 더불어 오는 5~6월께 후속 개혁 조처와 대폭적인 인사 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다. 요컨대,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연방안전국 만들기는 순차적인 개혁 확대를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얘기다. 다음 개혁 대상으로는 경제 부문이 가장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 이미 재정부(MF)와 경제발전부(MER)는 개혁안을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개혁을 내년에 있을 러시아 대선과 연관지어 보기도 한다. 고급 정보를 독점하게 된 연방안전국이 국내 정치, 특히 선거에 개입할 여지가 크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번 개혁은 이른바 ‘푸틴팀’의 힘을 강화하는 개혁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국방장관과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연방안전국 국장은 모두 푸틴팀의 핵심 멤버이다. 이 가운데 특히 파트루셰프 연방안전국 국장은 푸틴 대통령의 오른팔로 통한다(위 상자 기사 참조). 지난 대선 때, 푸틴팀은 푸틴의 크렘린 입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틴 스스로 자기 팔에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dwj@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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