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오폭 잦은 까닭이 있었네
  • 프랑크푸르트/허 광 (rena@sisapress.com)
  • 승인 2003.08.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록 영화 감독 제이미 도란,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 약물 복용 사실 밝혀내
어느 나라에서건 여객기나 전투기 조종사들의 마약류 따위 약물 복용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만약 이런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나면 비행 자격을 정지하는 벌칙이 따른다. 상습 음주 운전자가 운전 면허를 빼앗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이치가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 이 나라 조종사들은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약물 복용을 거부하면 군복을 벗어야 한다. 세계의 상식을 깨는 이 곳은 미국 공군이다.

이같은 사실은 아일랜드 출신 기록 영화 감독 제이미 도란이 최근 만든 영화에서 미군 조종사들의 증언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도란은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사라진 탈레반 포로 수천 명이 사막에 집단 매장된 사실을 추적한 영화 <마자르 학살, 미군은 보고만 있었나? >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감독이다. 지난 6월 말 독일 제1 공영방송을 통해 처음 선보인 그의 신작 <추악한 비밀, 마약에 눌린 전투기 조종사들>은 <마자르 학살> 못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켜, 8월 말까지 독일의 다른 공영방송국들이 무려 네 차례에 걸쳐 되풀이 방영했다.

도란과 직접 인터뷰하기를 거부한 미국 공군 당국은 다른 장소에서는 ‘장기간 전투에 투입되는 조종사들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피로감을 막기 위해 각성제가 필요할 뿐, 다른 부작용은 없다’고 밝혔다. 더구나 약물 복용은 조종사들이 원할 때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조종사들이 흔히 복용하는 약물은 중추 신경 각성제 덱시드린(Dexedrine)이다. 도란은 이미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미군 조종사 60%가, 또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가한 공군부대에서는 조종사 96%가 덱시드린을 복용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우울증·고혈압·심장 발작 증세 따위의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덱시드린 복용을 경고하고 있다.

치명적인 무기를 실은 전폭기 조종사들에게 이같은 부작용이 생긴다면 위험 천만한 일이다. 더구나 덱시드린 복용이 지속되면 책임감이나 비판력을 상실하게 되고, 그 대신 모험 충동에 빠진다는 경고도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군이 투입된 전쟁에서 서방 동맹국 군인들이 미군 전투기의 폭격이나 미사일 공격을 받아 희생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아 왔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지난 4월 막을 내린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서방측 병사 가운데 다수는 미군의 공격에 희생되었다. 미군이 동맹군을 제물로 삼는 이런 공격을 흔히 ‘친구로부터의 공격(friendly fire)’이라고 부른다. 동맹국 병사들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아무런 이유 없이 미군의 공격을 받은 사건은 알려진 것 이상으로 많다고 한다.

이라크에서 동료를 잃은 어느 영국 병사는 “미군 폭격기는 우리가 동맹군임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는 미친 카우보이처럼 우리를 공격했다”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결혼식장에 모인 민간인들을 공격한 사건도 있다.

이처럼 기이한 사건이 유럽에 보도될 때마다 미군의 이미지는 땅에 떨어졌다. 자기네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건을 조종사들이 일부러 꾸민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일들은 왜 반복되는 것일까. 조종사들의 약물 복용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을까. 도란은 이런 의혹을 품고 미군의 증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도란 감독이 만난 사람들은 다양하다. 그 중에는 미군의 약물 복용을 우려하는 전직 백악관 관료도 있다. 어느 퇴역 장성은 약물 복용이 자신의 지시에 따라 금지되었지만, 자신이 퇴역한 후 다시 관례가 되었다고 말한다. 약물을 복용한 조종사들은 전투 현장에서 경험한 일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갑자기 끝 모를 공포에 사로잡혔다. 현기증이 일었다.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전투기 안에서 갑자기 살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때 저지른 일을 지금도 치욕으로 생각한다.” 도란은 이같은 양심의 가책에 따라 약물 복용을 거부하다가 보복 조처를 당한 사례도 소개했다.

조종사들의 입을 통해 처음 드러난 약물 복용 문제는 이제 뜨거운 쟁점으로 변하고 있다. 미군의 공격에 희생된 영국·캐나다 병사들의 유족이 미군 조종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조종사측 변호사들은 약물 중독을 근거로 내세워 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따라서 약물 중독의 실상이 밝혀질수록 미군 당국에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미국 공군이 저지른 의혹 사건을 다시 조사하라는 여론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실제로 비근한 사례가 1998년 2월에 있었다. 당시 미군 전투기가 이탈리아 북부 스키장을 덮쳐 민간인 20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국방부와 검찰은, 이 전투기가 추락하자마자 미군측이 득달같이 달려와 블랙박스를 회수해 비행 기록 정보를 읽지 못하게끔 했다고 비난했다. 이탈리아는 미군이 전투기 추락의 내막을 숨기고 있다는 의혹을 품고 조종사를 이탈리아 재판에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미군은 응하지 않았다. 당시 공식적인 조사 결과는 ‘기계 이상에 의한 전투기 추락’. 당연히 조종사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이 보여준 이같은 대응으로 한때 두 나라 사이는 냉랭해졌고, 심지어 이탈리아 야당은 나토 탈퇴를 요구한 바 있다.

미국이 조종사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약물 복용을 그만두게 할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추악한 비밀’을 지키는 동안 전쟁에서 동맹국 병사들의 의미 없는 희생이 계속되고, 동맹국들과 불화도 빚으리라는 것이다. 한 미군 조종사는 “약물 복용으로 유지되는 전투력은 곧 죽음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