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북한.호주 국교 단절 내막 추적
  • 시드니.남상민 통신원 ()
  • 승인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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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국교 단절 ‘비사’ 발굴 추적/평양측, 호주의 한국 지지 비밀문서 입수 ‘격노’
1975년 10월 말 호주 캔버라 주재 북한대사관 외교관들은 설명도 없이 돌연 철수했다. 그리고 1주일 뒤 평양 주재 호주 외교관들도 당장 떠나라는 통보를 받고 베이징으로 쫓겨났다. 호주에 노동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맺은 외교 관계가 1년 만에 단절된 것이다. 그후 양국의 공식 단교 선언은 없었지만, 사실상 외교 관계가 끊긴 상태가 25년간 지속되었다.
1991년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 김용순 비서가 호주 노동당 초청으로, 1996년에는 대외경제위원회 관계자들이 경제 포럼에 참석하러 호주를 각각 방문하기도 했지만, 양국의 공식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한이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지난해 중반 북한의 요청으로 태국 방콕에서 복교 논의를 위한 첫 공식 회담이 이루어졌다. 이후 그 해 9월 유엔에서 백남순 외교부장과 알렉산더 다우너 외교부 장관의 회담, 올 2월 평양에서 양국 외교 당국자간 고위급 회담을 거치면서 지난 5월 다시 양국의 외교 관계가 재개되었다. 빠른 속도로 재개된 양국의 외교 관계는 지난 11월 중순 알렉산더 다우너 외교부 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뒤로 더 긴밀해지고 있다.

1996년 이래 북한에 대한 호주의 인도적 지원 액수는 2천3백만 달러에 달하고 있지만, 다우너 장관은 이번 방북 과정에서 5백만 호주 달러 상당의 식량을 추가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호주 정부가 원자력 안전 분야에서 인적 훈련과 기술 지원을 할 의향이 있음을 북한에 전달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결과물은 농업 부문 연구 및 개발 사업 공동 진행, 과학 정보 교환 등 농업 부문 협력을 위한 양해 각서 체결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호주 정부가 북한의 농업 분야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캔버라에 있는 호주 국제농업연구센터(ACIAR)에서 북한 농업 과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인적 훈련 지원과 교류는 외교 관계 정상화 전에도 제한적으로나마 있었고, 호주 정부도 관심을 가져 왔다. 유엔개발계획(UNDP)과 조지 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북한 대외경제위원회와 사회과학원 관료 5명이 1997년 중반부터 1년간 캔버라의 호주 국립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갔고, 1999년 하반기에는 호주 국립대학 대표단이 김일성대학을 방문해 서로 인적·학문적 교류를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양국의 이러한 관계 강화는 경제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91년 2천만 호주 달러에 달하던 양국간 교역액이 북한의 경제 사정 악화로 급감해 1995년에는 100만 달러로 떨어졌지만 지난해에는 7백60만 달러로 차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8월 평양을 방문했던 호주 무역위원회 동아시아 사무소 관계자들이 11월 중순 호주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북한 투자 설명회를 개최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호주 경제계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양국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1975년 양국 외교 관계가 갑자기 단절된 원인에 대한 의문도 호주 사회에서 새삼 제기되고 있다. 지난 11월 중순 호주의 주요 일간지 <더 에이지>는 이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소개했다. 첫째는, 판문점 미루나무 가지 절단을 둘러싼 미군과 북한군의 충돌 후 북한측이 수거한 미군의 도끼가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였으나 영어 실력이 모자라는 북한 군인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이해해 북한의 강력한 외교적 대응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북한을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모는 이런 가설은 북한의 외교관 철수와 추방이 도끼 사건이 난 1976년 8월보다 9개월 앞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가설의 기본적 성립 근거를 잃어버린다.
또 다른 가설은, 북한 외교관이 캔버라의 벤츠 자동차 판매소에서 마지막 남은 벤츠 승용차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한국 대사에게 인도되자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론들이 이런 터무니없는 우스개로 역사를 설명하려고 안쓰럽게 노력하는 데에는, 북한측이 왜 그런 단호한 조처를 취했는지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고, 다우너 장관도 북한과의 외교 관계 복원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 데 있다.

하지만 <시사저널>이 외교 단절 사태에 깊숙이 관여했던 당시 호주 당국자 등을 취재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이런 가설들이 제시하는 우스꽝스런 이유로 철수와 추방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양 주재 호주 외교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유엔의 권위를 거부해 오던 북한이 1973년부터 유엔의 토의에 참가함으로써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유엔사령부 해체, 주한미군 철수 같은 의제를 놓고 유엔에서 남북한의 외교전이 급격히 가열되기 시작했다.

이런 사안에 대해 남북한이 유엔 결의안 제출 경쟁을 벌일 때 북한은 호주 노동당 정부가 북한에 우호적이기를 기대했으나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유엔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호주 정부의 비밀 문서를 호주 외교관이 평양의 한 호텔에서 흘린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그 외교관이 몇 시간 후 호텔에 부랴부랴 돌아가 문서를 회수했지만, 문서 내용은 이미 북한 정부에 보고된 뒤였다. 곧바로 북한은 아무런 설명 없이 캔버라 주재 자국 외교관을 철수시켜 버렸고, 평양 주재 호주대사관에도 같은 조처를 취했다.

사태의 전말은 당시 소수 당국자들 간에 비밀스럽게 에피소드로 구전되었고, 당연히 아직까지도 호주 학계나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5월 양국의 복교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다우너 장관은 외교가 단절된 원인이 무엇이든 이제는 과거지사가 된 만큼 알 필요가 없고, 앞으로의 관계 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베이징의 호주 대사와 자카르타의 북한 대사가 각각 평양과 캔버라 대사를 겸임하는 것보다 다시 양국에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자는 북한측 제안에 다우너 장관은 먼저 양국의 관계 개선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며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양국이 순조롭게 경제 관계를 개선하기에는 더 무거운 장애물이 있다. 1970년대에 북한은 수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자 호주 ANZ 은행 등에서 빌린 부채를 상환 일정 협상도 하지 않고 갚지 않았다. 호주 금융기관에 대한 북한의 미상환 부채는 6천2백만 호주 달러에 이른다. 복교 협상 과정에서 호주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자 북한측은 현금이 없다고 솔직히 토로해 이 문제가 걸림돌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호주 경제계는 여전히 북한에 대한 투자와 경제 협력에 선뜻 나서기를 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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