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세대 부부 “아들은 싫어, 딸이 좋아”
  • 런던·韓准燁 편집위원 ()
  • 승인 1999.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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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여아 선호 풍조 확산…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반영
20세기 후반 국제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던 ‘철나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1년이나 집권했다. 73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대영제국의 수장으로 거의 반 세기를 군림하고 있다. 요즘에는 사내 아이 대신 여아 출생을 바라는 ‘딸 선호 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영국인들의 딸 선호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 자립도가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와 함께 영국 의학계에서는 중국·한국 등 동양 세계와는 대조적으로 여아 출산을 겨냥한 새로운 의술이 발전하고 있다.

“아들 키우기 너무 귀찮아”

런던에서 광고회사 고문으로 일하는 린다 데이비드. 지난해 처음 임신했을 때 그는 자기가 바라는 아이의 성별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친구들에게 공개하지는 않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 린다는 자신이 여자아이를 낳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사내 아이들은 결혼과 함께 아내 때문에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지만, 딸들은 결혼 후에도 늘상 어머니 곁에 가까이 있게 되니까.”

린다의 남편 그랜트도 역시 딸아이를 갖고 싶어했던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두 형제를 위 아래에 두고 자랐기 때문에 나는 사내아이들이 얼마나 말성꾸러기이고 부모 속을 썩이는지를 잘 안다. 여자 동생이나 누나를 둔 친구들이 부러워 내 첫아이가 딸이기를 바랐다.” 린다와 그랜트 부부는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건강을 체크하기는 했지만 남녀 성별 검사의 유혹은 용케 뿌리쳤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딸을 순산했다.

주부 재키 갤라처도 2년 전 딸을 낳았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결혼 후 사내아이 둘을 잇달아 낳고 세 번째 임신을 했을 때, 또 아들이면 어쩌나 불안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했지만 조세핀을 낳게 되어 너무 기뻤다. 사내 애를 둘 키워 보아서 알지만, 아들은 시끄럽고 말썽꾸러기에다 공격적이기까지 해 늘 속을 상하게 했다.”

‘아들 선호 시대,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다.’ 임신 및 출산 관련 전문 잡지 <아이 갖기(Having a Baby)> 최신호가 영국 사회 전반에 불어닥치고 있는 남아 출산 기피, 여아 선호 바람을 다룬 특집 기사의 제목이다. 주부 작가 앨리슨 피어슨 여사는 이 기사에서 임신 부부들의 눈물겨운 여아 낳기 노력을 소개하면서, 딸 선호 붐이 영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고 전했다. ‘여자 아이들은 인기가 있고 누구나 바라는 가정의 마스코트다. 우리의 미래이고 ‘성모 마리아’다. 딸 아이들이 이제 사내 아이들을 대신해 가정에서 제2의 아들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지난 7월25일자 <선데이 타임스>도 영국 사회의 가족 구성 변화 추이와 관련해 아들보다 딸을 갖기 원하는 신혼 부부들의 양태를 집중 보도했다. 이 신문은 장자 세습 전통을 지켜온 기성 세대의 낡은 사고가 차츰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영국 전역의 산부인과 병동은 물론 임신 전 신혼 부부들에게까지도 딸아이는 백만 파운드 복권에 당첨된 것만큼이나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 특집 기사는 영국 사회의 이같은 딸 선호 풍조, 그리고 여자 아이들의 인기 상승 및 여성의 지위 향상이 최근 영국 사회가 맞고 있는 ‘성 혁명(gender revolution)’을 반영한다고 분석한다.

사내 아이들은 학교에서 철자법도 쉽게 익히지 못하는 데다가 말썽을 피워 학교에서 아예 쫓겨나는가 하면, 사회 적응에도 실패하는 일이 많아 남편과 아버지로 성장해 가는 데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이같이 남성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지위가 떨어지면서, 그 자리를 상대적으로 사회에서의 지위가 차츰 높아져 가는 여성들이 대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런던 대학 아동심리학과 도로시 아이슨 교수는 “지난날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걸림돌이 되어 왔던 장애물들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여자 아이들은 자라면서 대부분 범죄와 폭력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사고나 질병으로 숨지는 경우도 사내 아이들보다 훨씬 적으며, 특히 경제적 사회적 환경과 조건도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돕는 쪽으로 변화해 왔다. 그 단적인 예로 아이슨 교수는 혼인 때 여성의 과도한 경비 부담이 사라졌다는 점을 든다. 요즘 부모들은 그래서 딸아이가 결혼 전에 임신을 해서 자신들의 명예에 먹칠을 한다고 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지난날에는 부모들이 사위감을 고르는 데 동분서주했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설 자리를 잃은 아들들이 어떻게 세파를 헤쳐갈 수 있을지 골머리를 앓는다. 그 결과 영국의 어머니들은 뒤치다꺼리에 내내 시달리다가 결국 떠나 보내는 아들보다는, 쉽게 키우고 나이 들어서까지 친구처럼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딸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정작 영국의 임신부들이 사내 아이 대신 딸을 갖기를 원한다 해도 아직은 미국과 달리 전통적 민간 요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태아의 성별을 사전에 선택하는 이른바 시험관 아기 시술은 유전 및 건강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영국 땅에서 허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대부분의 임신부가 딸 출산을 마음 속으로만 바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와 관련해 런던 산부인학 및 임신학 연구센터의 이언 크라프트 교수는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남성의 정액에서 남성 Y 염색체를 지닌 정자를 분리해내는 요법, 즉 에릭슨 요법이 합법화할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일부에서는 ‘남성 죽이기’ 역차별 우려

이미 78년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스양이 태어난 영국에서는, 94년 2월 28일 ‘런던 젠더 클리닉’에서 정자 분리 임신 요법을 이용해 세계 최초로 태아의 성별을 인공적 방법에 의해 사전 선택 결정한 ‘디자이너 베이비’ 소피가 태어난 바 있다. 이같은 일련의 의학 기술 발달은 임신 부부가 태아의 성별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53 대 47로 여아의 출생 비율을 앞서고 있는 남아 출생 비율이 머지 않아 반전되어 결국 여아 출생이 남아를 앞지르는 시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의학계는 내다본다. 실제로 93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구조사센터가 영국 임산부를 대상으로 실시한 태아 성별 희망 조사는 영국인들이 남아보다 여아를 더 선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사 대상자의 59%는 태아의 남녀 성별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였고 그 가운데 ‘사내 아이만 선호한다’는 경우는 6%에 지나지 않아 거의 3분의 1 이상이 여자 아이 선호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영국 사회의 이같은 변화 추세는 사회 일각에서 적지 않은 반발과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정 잡지 <주니어> 편집장 크리스 타가트씨는 아들에 대한 평가 절하가 그동안 대부분 학교 성적 비교에서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크게 처지고 있다고 과장한 일부 언론 보도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초·중·고의 수학 및 과학 과목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앞지르고 있음을 특별히 감안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남녀 성차별의 왜곡된 실태를 파헤친 <무죄: 현대 남성을 옹호하면서>의 저자이자 저명한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토머스 박사는 한술 더 떠 “여성 차별이 이제 남성 차별로 바뀌었다. 일류를 지향하는 부모들의 의식 구조가 최선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사회 풍조를 불렀다. 젊은 여자 아이는 마치 고급 승용차 ‘BMW’처럼 선호되고, 상대적으로 무력하게 묘사되는 남자 아이들은 중고 ‘포드 차’로 평가된다. 이러한 풍조는 우리가 인간 자체까지도 상품화해서 값을 매기는 상업주의에 흠뻑 물들어 있음을 드러낸다”라고 말했다.

토머스 박사는 더 나아가 여자 아이들의 미래가 상대적으로 지난날보다 더 밝아졌다는 점에서 딸에게 과도한 기대와 희망을 갖는 부모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린 소녀는 사내 아이에 비해 다루기 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들이 딸에게 거는 과도한 기대와 무조건적인 집착은 결국 위험한 환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라는 것이 그의 경고이다.

그럼에도 다음달 초 영국 고등학생들의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GCSE, A 레벨 시험 성적이 발표되는 날, 지난 5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남학생들의 학업 성적이 올해도 형편없을 경우, 영국 언론들은 또다시 이를 거론하며 여아 선호 및 여성들의 약진을 대대적으로 찬양하는 데 열을 올리게 될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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