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주둔 미군 감축하는가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7.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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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태평양함대 사령관 “국방부, 검토중”…당장은 어려울 듯
미국 국방부는 4년에 한번씩 국방정책보고서(Quadrennial Defense Review·QDR)를 발간한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국방 전략·병력 구조·무기 현대화 계획 등 국방 업무 전반에 대한 장기적인 평가를 담아 의회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1년을 주기로 작성되는 의례적인 국방보고서와 달리, 국방정책보고서는 육·해·공군 본부와 해외 주둔 미군 사령부 수뇌부가 오랜 시간을 두고 국방 전력 전반에 관해 평가하고 분석하는 보고서라는 점에서 특히 의의가 있다. 4년 전 클린턴 1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작성되기 시작한 국방정책보고서가 최종 분석 정리 작업을 거쳐 오는 5월15일 의회에 제출된다.

두 달 뒤면 밝혀질 국방정책보고서 내용 가운데 특히 아시아·태평양 주둔 미군 병력과 관련해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조셉 프루어 제독(54)이 지난 2월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그는 미국의 국방 전문지 <디펜스 데일리>와의 회견에서‘현재 국방부가 마련하고 있는 국방정책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라서는 앞으로 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특히 그는 아시아의 안보 취약 지역인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화해할 경우 주한미군 또는 주일미군의 병력 감축까지를 포함하는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나온 지 한 달도 못되어 그는 일본 <아사히 신문>과의 회견에서 똑같은 미군 감축론을 거론했다. 그는 지난 3월29일자 이 신문과 가진 회견에서‘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될 경우’ 4만7천명에 이르는 주일미군 감축 문제를 미·일 양국이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병력 감축 논의는 화해의 성격과 속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 회견에서 그는 또 “한반도를 설명하는 데는 재통일이라는 말보다는 화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화해라는 표현과 관련해 그는‘남북한이 서로 독립된 국가로서 긴장을 완화하고 국경 지대에서 평화가 유지되는 상태’라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힘의 공백 첨단무기 체제로 메울 것”

이같은 주장은 존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이 지난 3월 초 의회 증언에서 사견임을 전제로 “남북이 통일되더라도 아시아는 현재의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과 대조를 이룬다.

미군 감축에 관한 내용이 국방정책보고서에 공식으로 포함될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양함대를 이끌고 있는 프루어 제독의 소신 발언은 9만에 가까운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에 특히 충격적이다.

프루어 제독은 자신의 발언이 일파만파로 확대되면서 논란을 일으키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과 가진 회견에서‘국방정책보고서가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아시아 주둔 병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논란은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자 미국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앞으로도 아시아 주둔 미군 병력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즉 아시아를 포함해 전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 구조에 관해 면밀히 검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아 지역 만큼은 현재의 10만명 수준에서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병력 감축은 시기 상조라는 논리가 더 우세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같은 입장은 4월에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는 윌리엄 코헨 신임 국방장관의 입을 통해 해당국에 직접 전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방 정책의 최고 결정권자인 코헨 장관의 다짐이 전달된다고 해도 해당국들이 이를 얼마나 신뢰할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그의 다짐은 어디까지나 97년 4월의 시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장기적으로도 그럴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 기자였던 한 미국인 국방 문제 전문가는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프루어 제독이 제기한 아시아 주둔 미군 감축론은 단순한 시험 풍선이 아니라 국방부 실무 참모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가장 최근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주둔 미군이 이미 10만선 이하인 9만3천까지 떨어진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통화에 응한 그는 “현재 국방부는 해외 주둔 지상군을 줄이되, 첨단무기 체제를 최대한 이용한 공군 및 해군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 2010년까지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상당수가 줄어들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한동안 잠잠하던 아시아 주둔 미군 병력 10만 유지론이 최근 들어 또다시 들먹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수십만 해외 주둔군을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예산이다. 2000년대를 눈앞에 둔 지금은, 천문학적인 국방 예산이 과거 냉전 시절처럼 별다른 저항 없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더욱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은 연방 정부의 만성 재정 적자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2000년대 초까지 균형 예산을 실현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예산의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며 성역으로 여겨지던 국방 예산에 대해서도 공화당은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새 정책 나오려면 2~3년 걸릴 듯

가장 최근의 실례로, 내전 지역인 보스니아에서 평화 유지를 맡고 있는 미군 대서양사령부는 작전 수행에 필요한 긴급 예산 20억달러를 의회가 이런저런 이유로 승인을 늦추는 바람에 일부 미군 병력을 본국으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는 대서양사령부를 이끌고 있는 존 쉬한 해병대 사령관이 최근 하원 국가안보위원회에서 털어놓은 내용이다. 20억달러가 당장 제공되지 않을 경우 5월부터 보스니아에 파견된 미군 병력의 일부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처럼 국방 예산마저 삭감 도마에 오른 상황인 만큼 아시아 주둔 미군 병력 수준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전망은 클린턴 행정부 1기 때부터 끈질기게 나돌았다. 그럼에도 이 지역 미군을 줄일 수 없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냉전이 끝난 뒤 아시아의 안보 상황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과 중국의 군 현대화 계획으로 여전히 불안하다. 둘째,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군사 대국을 꿈꾸는 중국과 일본이 그 공백을 메우려 할 것이고, 그럴 경우 한국 등 주변국들이 군비 경쟁에 나설 것이다. 셋째, 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 혼란으로 이 지역의 경제 번영이 위협받을 경우 이 지역에 대외 교역의 3분의 1을 의존하고 있는 미국도 큰 손실을 입을 것이다.

이같은 논리를 완성해 2000년대에도 아시아 주둔 미군을 최소 10만명 선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조셉 나이 전 국방차관보였다(56쪽 딸린 기사 참조). 그는 차관보로 제직하던 94년 ‘동아시아 전략보고서’(EASR)에서 ‘앞으로 20년 동안 아시아에서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려면 최소 10만명의 미군 주둔은 필수이다’라고 주장했었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는 아직도 유효할까. 현시점에서 단기적으로 검토할 때 그렇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 보면 어떨까.

국방부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앞서의 하와이 소식통은 한국인들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한다. 즉 워싱턴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는 어떤 의제라도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이 전 차관보의 논리가 설득력을 지니긴 했어도, 첨단무기 체제를 구축해 미래의 미군 병력 구조를 재조정하고자 하는 것이 국방부 수뇌부의 생각이기 때문에 아시아 정책 역시 당연히 재검토 대상이 됐을 것이다.”

테드 워너 국방부 전략 및 군수 담당 차관보는 미군 감축론과 관련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 뷴>과의 회견에서‘아시아 쪽은 현재 병력을 그대로 유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워너 차관보 같은 국방부 실무자뿐 아니라 국방 관련 민간 전문가들도 아시아 주둔 미군 감축론을 꺼내는 것이 아직은 이르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최근 ‘일·미 동맹의 미래’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일본의 오키자키 히사히코씨는 최근 한 외지와 가진 회견에서 현재 수준의 미군 병력은 미·일 안보 동맹의 주축이므로 절대 균형을 깨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주둔 미군 병력에 변화가 생길 경우 3만7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의 대외 정책을 연구하고 있는 외교안보연구원 김국진 박사는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그런 의견을 제시했다 해도 정식 정책으로 채택되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만큼 가까운 시일 안에 미군이 10만명 이하로 감축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라고 평했다.

관련 전문가들도 국방정책보고서가 5월15일 의회에 제출되면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의회에서 빚어지고, 또 이 보고서를 반박하는 보고서들이 줄줄이 나오리라는 점을 들어 아시아 주둔 미군 병력에 관한 새로운 정책이 나오려면 최소 2~3년은 걸릴 것으로 본다. 한 전문가는, 설령 미국 정부가 미군 감축에 관한 새로운 정책을 세운다 해도 이를 한국이나 일본처럼 직접적인 이해 관계를 지닌 나라들에 설득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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