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치 미래, 공산당이 좌우한다
  • 일본 아타미·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7.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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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정당으로 급부상…‘자민­공산 대결 시대’ 임박
사토 고코(佐藤孝行) 총무처 장관 사임 문제로 일본 정국이 요동을 치던 지난 9월22일. 일본의 유명한 온천지 아타미에서 일본공산당 제21회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회가 열리는 이토 학습회관 도로변에는 ‘공산당 박멸’을 외치는 행동 우익의 가두 선전차가 몰려들어 일본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도 일본 사회에 거세게 남아 있음을 실감케 했다.

반면 전당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일본 보도진 70여 명이 북새통을 이루고, 일본공산당 대회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중국의 보도진에 대한 취재가 허락된 것을 보면서 일본공산당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시사저널>이 일본공산당 전당대회를 취재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최근의 각종 선거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일본공산당이 일본 정치를 양분하는 거대한 정치 세력으로 떠오를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의 전후 정치는 38년 동안 이른바 ‘55년 체제’를 지속해 왔다. 분열된 좌파와 우파가 55년 10월 사회당으로 통합되고 그 해 11월 같은 보수 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자유민주당으로 합병함으로써 자민당과 사회당이 대결하는 2대 정당제가 정착했다.

그러다가 93년 8월 자민당이 중의원 총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는 데 실패함에 따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야당 연립 정권’이 들어섰다. ‘55년 체제’가 보수 대 혁신 세력의 대결이었다면 이때는 자민 대 비자민 세력이 대결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자민 대 비자민 대결 구도는 1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사회당이 ‘55년 체제’의 반대 축이었던 자민당과 손잡고 94년 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을 발족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 정계를 2대 보수 세력으로 양분하겠다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신진당 당수의 실험도 점점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그는 작년 10월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독주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선거 이후 당 소속 의원 23명이 이탈하는 것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을 노정하고 있다.
지방 의원 가장 많이 거느려

이러한 정치적 폐색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오자와는 자민당과 이른바 ‘보·보 연합’을 모색 중이다. 그러나 원내 세력이 자민당의 절반 정도로 몰락한 신진당이 자민당과 보·보 연합을 모색한다는 자체가 자민당의 아류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자민당도 신진당도 아닌 제3의 세력이 얼마전 등장한 ‘개혁회의’이다. 이 모임에는 신진당·민주당·태양당·민주개혁연합 소속 중·참 의원 87명이 참가하여 내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 이전에 신당을 창당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당, 즉 현재의 사회민주당이 이른바 ‘여당내 55년 체제’에 매몰되어 존재감을 상실하고, 자민 대 비자민이라는 보수 양당 구도가 자민당의 과반수 돌파에 따라 큰 의미를 잃어가는 지금 일본의 정치 판세는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지난 7월 도쿄도 의회 선거 결과이다. 4년 전 의석을 44개 확보하는 데 그친 자민당은 ‘55년 체제’ 붕괴 이후 정치 유동화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자민당 지지로 돌아섬으로써 의석을 10개 더 늘렸다.

반면 자민당 아류 정당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신진당은 11명이 입후보했으나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또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에 참가함으로써 혁신 정당 이미지를 상실한 사회민주당은 4년 전 14개이던 의석이 단 1개로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일본공산당은 4년 전 13 의석에서 2배인 26 의석으로 늘어 일약 자민당에 이은 제 2당으로 떠올랐다. 공산당만이 애오라지 야당의 길을 걸어 왔다는 점을 유권자들이 높이 평가한 때문이다.

여당 경험이 없는‘유일 야당’ 공산당은 도쿄도 의회 선거뿐 아니라 국정 선거인 작년의 주의원 총선에서도 의석 수를 두 배로 크게 늘렸다(26 의석). 특히 일본 정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비례구에서 공산당이 자민당의 40%에 가까운 7백27만 표를 획득했다는 점이다.

일본공산당의 약진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전당대회 전날 치러진 중간 지방 선거에서 공산당은 지방 의원을 53명 당선시켰다. 이로써 공산당의 지방 의원 수는 4천51명으로 늘어나 자민당을 제치고 지방 의원을 가장 많이 거느리는 다수당 위치를 확보했다.

이렇게 보면 55년 체제가 무너진 이후 4년간 유동화 현상을 보였던 일본 정치는 자민당과 공산당이 맞대결하는 구도로 서서히 이동해 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일본의 정치 평론가들이 말하는 ‘자·공(自共) 대결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후와 데쓰조(不破哲三) 공산당 위원장은 21회 전당대회에서 이런 자신감을 발판으로 하여 21세기 초기에 혁신 세력은 물론 보수 무당파 층과도 손을 잡아 이른바 ‘민주연합정부’를 수립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공산당이 일본의 정치 구도를 자·공 대결 시대로 몰아가 민주연합정부를 세우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일본공산당이 비록 지방 의원 수에서 최다수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지만 전체 점유율은 아직 6.2%밖에 안된다. 일본의 지방 의회에서 보수계 무소속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 작년 총선거에서 두 배로 의석 수를 늘렸다고는 하지만 전체 의석의 5% 정도인 26 의석에 불과하다

정치 평론가 하야사카 시게조(早坂茂三)는 월간 <쇼쿤> 10월호에서 법안 제출권을 가질 수 있는 50 의석 이상 중의원 의석 수를 확보할 때 비로소 공산당이 정계 재편의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 적극 모색

<시사저널>이 일본공산당 취재에 참가한 또 다른 이유는 최근 그들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공산당은 북한 노동당과는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이후 완전히 관계를 단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한국과는 서울올림픽 때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 기자가 방한한 것을 계기로 관계 개선을 적극 모색해 왔다.

일본공산당은 이에 대한 정지 작업으로 88년 9월 ‘조선 문제에 대한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견해’를 발표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남북 통일의 선결 조건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이어 공산당은 올 3월 ‘남조선’이라고 불러왔던 호칭을 ‘한국’으로 바꾸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정식 명칭인 대한민국을 사용한다고 선언했다.

또 기관지인 <아카하다>의 서울 특파원 사무소를 개설하기 위해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에 지난 3월 관계 서류를 제출했고, 후와 위원장이 한국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방한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일본공산당에 문호를 개방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한둘이 아니다. 일본공산당은 앞서의 상임간부회 견해에서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한·일 기본조약을 신속히 개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고 선언했다. 또 일본공산당은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 통일의 선결 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미·일 안보조약 즉각 폐지와 주일미군 완전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공산당에 대한 문호 개방은 상당한 우여곡절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치가 ‘55년 체제’에서 ‘자·공 대결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면 물꼬를 마냥 틀어막아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보수 우경화의 병마개였던 사회민주당 세력이 소멸해 가고 있는 지금 그 대체 세력으로서 일본공산당이 갖는 의미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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