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슨은 웃지만 사법제도는 운다
  • 워싱턴·金在日 특파원 ()
  • 승인 1995.10.1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슨 재판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0년 경력인 패트 해링턴 변호사는 “나는 배심원단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심슨이 범인이라고 믿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이 한마디는 심슨 재판과 관련해 미국 사법제도, 특히 배심원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사회 일각에서는 배심원 제도를 없애자는 주장이 있던 터다. 그러나 그같은 주장은 아직 소수 의견에 불과하다. 해링턴씨 역시 “배심원 제도는 미국 사법제도의 근간으로서 재판의 공정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 문제는 배심원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느냐이다”라고 말한다.

13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배심원 제도는 왕권 전횡 시대에는 인권을 수호한다는 측면에서 장점이 많았다. 이 제도는 미국에 건너와서도 법을 상식 선에서 집행한다는 점에서, 또 공동체 대표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받았다. 그러나 요즘은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기도 한다.

우선 배심원단은 대개 하는 일없이 노는 사람이나 퇴직자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럴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이 일당 40달러(주 마다 다르다)를 받고 배심원으로 차출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또 배심원들의 교육 수준이 일정치 않다. 고등 교육을 받지 않은 배심원은 재판 내용이 복잡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배심원은 범죄가 생긴 지역 투표권자 가운데에서 무작위로 추출한다. 우선 법원 사무국이 전화번호부 등을 이용해 배심원이 될 만한 사람 3백~4백명을 뽑는데, 검찰과 변호인단의 검증을 거치면서 편견을 가질 만한 사람은 제외한다. 나머지에서 양측이 반대하지 않는 사람으로 다시 배심원 12명을 선정한다. 이 과정이 심슨 재판의 경우 한달 반 걸렸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초 배심원으로 선정돼 선서한 12명 가운데 평결 까지 참여한 배심원은 두 사람뿐이다. 10명이 예비 배심원으로 교체된 것이다. 심슨을 만난 적이 있는 사람, 동거하는 남자에게 구타 당한 적이 있는 사람, 심슨을 치료한 적이 있는 의사에게 치료 받은 적이 있는 사람, 책을 쓸 의도를 가진 사람, 배심원과 싸운 사람 등이 교체됐다.

심슨 사건은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배심원들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한 호텔에 격리됐다. 그들은 보안관의 감시 속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볼 수 없었고, 신문도 심슨 관련 기사가 가위질 당한 것만 볼 수 있었다. 바깥 소식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 당한 상태에서 배심원들 간에 재판과 관계되는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과거의 예를 보면 격리 생활로 인해 배심원이 이혼 당하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남녀 배심원끼리 눈이 맞아 밀애하는 경우도 있었다.

‘베갯머리 송사’가 판결에 영향 미쳤나

그런데도 배심원들은 재판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주일에 한번씩 가족 면회와 부부의 잠자리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베갯머리 송사, 즉 이불 속에서 나눈 이야기까지 검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배심원들이 형식상 엄격한 격리 상태에 있었다고 하나 외부 정보를 전혀 접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무리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배심원 12명 가운데 9명이 흑인이었다는 점은 판결이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일게 했다. 사실 심슨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종적인 요소가 개입돼 있었다. 처참하게 살해 당한 사람은 백인 남녀였고, 용의자는 흑인이었다. 재판 도중 폭로된 로스앤젤레스 경찰청 전직 형사 마크 퍼먼의 육성 녹음은 백인 형사들의 인종 차별 실상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였다. 심지어 무고한 흑인을 때려 죽이고 모른 체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최후 변론에서 심슨의 변호사 조니 코크란 2세는 철저하게 ‘인종 카드’를 사용해 흑인 배심원들의 정서에 호소했다. 흑인이 아닌 배심원 세 사람도 무죄 평결에 동의했다. 배심원 평결은 만장일치로 내려지기 때문에 웬만한 독불장군이 아니고서는 대세를 따르지 않기가 어렵다는 점도 배심원 제도의 한 가지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죄 평결 직후 실시된 ABC TV의 여론조사에서 흑인 83%가 평결이 옳았다고 응답한 반면 백인은 37%만이 동의한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백인의 70%는 여전히 심슨이 유죄라고 생각한 반면 흑인은 19%만이 심슨 유죄에 동의했다.

심슨 사건은 미국 재판에서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과 함께 인종 문제가 중요한 변수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