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 특공대' 엄호하는 일본 언론
  • 도쿄·蔡明錫 편집위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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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요미우리> <산케이>, 에토 전 장관 비호… 한국 언론에 뒤집어씌우기도
한국과 일본 간에 과거사를 놓고 마찰이 생길 때마다 일본에서는 그 책임의 일단을 한국 언론에 전가하려는 경향이 거세지고 있다. 즉, 일본이라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한국 언론이 대수롭지 않은 일도 침소봉대해서 보도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식민 통치를 미화하는 발언으로 총무처 장관 직을 사임한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의원을 경질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언론은 또다시 그런 습성을 드러냈다.

일본 언론의 보도를 종합하면, 에토 장관의 문제 발언이 나온 것은 지난 10월11일 오전 8시30분께 참의원 별관 정부위원실에서 ‘내각 기자회’ 소속 기자들과 ‘오프더 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가진 자리에서였다. 내각 기자회 소속 기자 가운데 누가 흘렸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에토 장관의 발언 일부가 11월1일 발매된 회원제 월간지 <選擇>에 ‘뚜껑이 닫힌 모 현직 각료의 폭언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동아일보>는 이 월간지의 기사와 <동아일보> 도쿄지국에 배달된 익명 투서를 토대로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기자 몇 사람에게 확인 취재한 뒤 11월8일자 신문에 에토 장관의 망언을 보도했다.

그러자 한달 간이나 침묵을 지키던 일본 언론도 에토 장관의 문제 발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각 기자회는 <동아일보>의 보도가 나온 8일 네 차례 모임을 갖고 오프 더 레코드 해제를 요청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총무처에 두 차례에 걸쳐 비보도 해제를 요청했다.

한국 혐오 감정 불 지핀 <산케이 신문>

그러나 총무처와 에토 장관은 “그런 발언은 없었던 일로 해달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각 기자회는 계속 오프 더 레코드 협정을 준수하기로 다시 잠정 합의했으나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 신문>이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옴으로써 문제가 일본 언론계의 내분으로 비화하기에 이르렀다.

<마이니치 신문>은 11월9일자 조간에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미화한 에토 장관의 발언 요지를 싣고, 10일자 조간에 오프 더 레코드 협정을 깨게 된 경위를 게재했다. 이 신문은 ‘본사 견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발언의 개요가 보도됨으로써 비보도를 전제로 한 발언이 무의미해졌다는 점과, 한·일 양국의 외교 문제와 에토 장관 진퇴 문제로 비화했다는 점을 들었다.

<동아일보>와 제휴하고 있는 <아사히 신문>은 10일자 조간의 ‘오프 더 레코드 취재와 알 권리’라는 칼럼에서 발언 공개를 엄호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 신문은 오프 더 레코드 취재란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폭넓게 확립되어 있는 ‘보도의 룰’이라고 전제한 뒤, 취재원과 기자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돼 있지 않으면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당시의 에토 장관 발언이 과연 오프 더 레코드 취재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비해 <요미우리 신문>과 <산케이 신문>은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이 공개된 데 대해, 그것도 한국 신문에 폭로된 것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요미우리 신문>은 9일자 해설 기사와 10일자 사설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에토 장관의 역사 인식에 대한 옳고 그름은 둘째로 치고, 중요한 것은 오프 더 레코드 간담 약속이 깨진 결과 외국의 보도기관에 그 내용이 알려진 것이다’라고 에토 장관 발언 그 자체보다는 보도 경위를 크게 문제 삼았다.

<산케이 신문>도 11월9일자와 10일자 조간에서 비슷한 논조를 폈다. 이 신문은 ‘에토씨는 일본을 포함한 극동의 역사에 대해서 자신의 인식을 밝힌 데 불과하다. 또 알려진 바와 같이 꼭 그가 한일합병을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이 신문은 ‘사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그것을 거론하여 지탄하는 것은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당시 에토 장관을 비호하는 기사를 실었다.

따지고 보면 이 두 신문은 이전부터 보수·우익 성향의 기사로 독자를 확보해 왔다. 예를 들어 발행 부수가 천만부를 돌파했다고 주장하는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언론사로서는 이례적으로 헌법개정안 시안을 독자적으로 만들어 공표한 바 있다. 미군 점령군에 의해 강요된 현행 헌법을 개정하여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개편하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하여 정치 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요미우리 신문>의 사시나 다름없다.
<산케이 신문> 역시 일찍부터 ‘도쿄 군사 재판 사관’, 즉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전범이라는 역사관을 부정하는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종군위안부 마찰이 일어났을 때 제일 먼저 ‘혐한 감정’에 불을 지핀 것도 바로 이 신문이다.

두 신문은 에토 장관이 사임하는 과정에서도 그를 비호하는 사설을 연일 게재했다.

예를 들어 <요미우리 신문>은 ‘각료의 인사권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12일자 사설에서 ‘일본 각료가 외국의 압력에 의해 사임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산케이 신문>의 논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넋나간 수상 관저(11일자)’ ‘정치의 퇴폐를 보여준 에토 사임(14일자)’이란 사설에서 이 신문도 에토 장관에 대한 사임 압력을 한국의 내정 간섭이라고 비난하고, 그 압력에 굴복한 무라야마 총리를 통렬히 비난했다.

물론 이 두 신문을 제외하면 일본의 6대 전국지 중 네 신문은 비교적 객관적 보도로 일관했다는 평가를 내릴 만하다.

예를 들어 <요미우리 신문>에 이어 두 번째로 발행 부수가 많은 <아사히 신문>은 ‘에토씨 사임으로 뚜껑을 덮을 수는 없다(14일자)’는 사설을 통해, 에토 발언의 문제점과, 사임 시기가 늦어짐으로써 양국간 감정의 앙금만 커지게 됐다고 일본 정부의 우유부단했던 태도를 추궁했다.

잘 알려진 대로 <아사히 신문>은 <요미우리 신문>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신문이다. <요미우리 신문>이 헌법 개정을 지지하면 <아사히 신문>은 헌법 옹호를 주장한다. 그래서 <아사히 신문>은 종종 우익 단체의 표적이 되어 습격 받기도 한다. 수년 전 노무라 슈스케라는 신우익계의 거물이 <아사히 신문> 본사에서 권총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 신문의 이른바 ‘좌익사관 논조’가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정통지 <아사히 신문>은 객관적 보도

이렇게 보면 일본을 대표하는 두 신문이 에토 장관의 발언과 사임 과정에서 각각 정반대 논조를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신문이 더 공정함과 권위를 인정 받는가. 비록 판매부수가 천만부와 8백50만부로 1백50만부의 격차가 나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아사히 신문>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여섯 개 전국지 가운데 이 두 신문을 제외한 네 신문의 영향력은 엇비슷하다. 발행 부수가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2백만~3백만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마이니치 신문>은 한때 <요미우리신문>, <아사히 신문>과 어깨를 겨루는 일본의 3대 전국지로 꼽혔으나 최근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과 색깔이 비슷한 데다 내분과 기자 추문이 겹쳐 이미지가 크게 떨어진 때문이다.

이에 비해 수도권 일대를 주전장으로 하고 있는 <도쿄 신문>과 일본 최대 경제지 <닛케이 신문>은 중도적 색깔이 강하다. 이렇게 보면 일본 언론계는 오른쪽에 <요미우리 신문>과 <산케이 신문>이 포진하고 있고, 왼쪽에는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이 위치하여 대결하는 구도를 갖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물론 이런 구도는 에토 장관 망언뿐 아니라 과거사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되풀이된다.

최근 한·일 관계는 미래지향적이 아니라 과거지향적 관계로 회귀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한국의 반일감정이나 한국 언론의 침소봉대식 보도 탓이 아니다. 바로 망언과 실언을 되풀이하는 일본 정치가들이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집요하게 과거사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부 일본 언론의 편협적 보도 자세가 바로 미래지향적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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