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4자 회담 연말에 응하겠다"
  • 南文熙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7.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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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유엔대표부 고위 관계자 발언… 한국 대선 때 많은 것 얻어내기 위한 전략
3자 고위급 회담 북한측 수석 대표인 김계관 부부장은 지난 4월21일 뉴욕 유엔플라자 호텔에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전날까지 실무 접촉을 강행하며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한·미 양국 대표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미국 대표단이 뉴욕에서 영원히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나’. 회담 결렬을 공식 선언한 21일자 미국 국무부 논평에는 휴일까지 공쳐 가며 기울여온 그간의 노력에 대한 낙담이 짙게 배어 있다.

답답하기는 한국측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회담이 결렬된 것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결렬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길고 긴 협상 과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4월16일 첫 회담 직후 ‘5월중 예비 회담, 6월중 본회담 개최’라는 장밋빛 브리핑으로 현지에 파견된 한국 기자들을 ‘오보의 행렬’로 인도했던 정황에 비춰보면 한국 대표단 역시 머쓱해진 것은 사실이다.

16일의 첫 회담 직후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회담이 타결될 것에 대비해 환영 성명까지 준비한 것에 비하면 결과는 참담했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은 협상 초기 ‘4자 회담과 쌀 지원은 별개’라며 적극적이던 북한측이 ‘선 쌀지원 후 회담’이라는 강경 방침으로 갑자기 선회한 배경에 매우 의아해 하고 있다고 한다.

‘본회담은 다음 정권과 한다’는 계획도 수립

그러나 최근 북한 유엔대표부의 고위 관계자를 접촉한 뉴욕의 한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3자 설명회 결렬은 북한의 새로운 협상 전략 때문임이 분명하다. 북한 지도부가 선 쌀지원 보장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이 소식통은 말했다. 93년 미국이 러시아에 시장 경제 제도를 도입할 경우 3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가 나중에 상황이 변했다며 이를 지키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북한 지도부가 이 사실을 유념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엔대표부 고위 관계자는 자기네가 그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그는 전했다. 북한 지도부는 회담 타결을 서두르기보다는 여건이 유리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새로운 협상 전략을 최근 수립했다는 것이다.

북한측의 새로운 협상 전략에 따르면 협상 타결 시점은 올해 연말로 대폭 늦춰졌다. 유엔대표부 고위 관계자는 이 소식통에게 “4자 회담에는 응한다. 그러나 그 시기는 연말쯤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측이 연말을 목표로 잡고 있는 것은,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는 연말이 북한으로서는 가장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시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연말을 넘길 경우 ‘대선 프리미엄’이 없어지기 때문에 연말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은 또 현정권 막바지에 협상을 타결지어 효과를 극대화하되 본회담은 다음 정권과 추진한다는 이중 효과를 노리고 있기도 하다.

다만 현재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이 연말까지 기다릴 여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이 점에 대해 이번 협상 과정을 지켜본 몇몇 북한 전문가들은 협상 전술을 구사할 만한 여유는 최소한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물론 그 안에 많은 주민이 기아로 고통받고 죽어가겠지만, 북한 당국은 ‘눈 하나 깜박 않고 버틸 것’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협상 전략의 또 한 가지 특징은, 협상 타결을 연말로 미룬 뒤, 그 안에 진행될 남북간, 미·북한간 모든 개별 협상을 4자 회담과 연동하는 ‘일괄 타결 방식’을 적용해 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유엔대표부 관계자는 “앞으로 있을 미국과 북한 간의 모든 협상에서 개별적 협상 타결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미국과 북한은 3자 설명회가 무산된 다음날인 지난 4월22일 뉴욕 실무 접촉에서 5월2~10일에 뉴욕에서 미군 유해 송환 협상을 벌이고, 5월12~13일에는 미사일 협상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또 머지 않아 연락사무소 개설 협상도 재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새로운 협상 전략에 따라 북한은 이들 개별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쌀지원 문제를 강력하게 제시하면서 타결 시점을 최대한 뒤로 늦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전략을 통해 북한은 미국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미국이 다시 한국에 쌀지원 압력을 가하게 하는 ‘스리쿠션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국무부는 협상 중재자라는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원이 없어 고뇌에 빠져 있다. 따라서 북한측이 미·북한 간의 현안을 걸고 압박을 가해오면 그 돌파구로 한국 및 일본을 응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북한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이런 전략은 벌써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의 언론 매체들이 북한의 기아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국방부나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북한 화생방 무기의 위험성 및 전쟁 가능성에 대해 경고성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한국 정부에 대해 대북 쌀지원을 촉구하는 미국 정부의 메시지를 뒤에 깔고 있는 것이다.

또 현재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대북 쌀지원 시기에 대해서도 미묘한 시각 차이가 있다. 한국 외무부가 4자 회담 본회담이 열려야 쌀지원이 가능하다고 못박고 있는데 비해 미국은 예비 회담 단계부터 쌀이 들어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북한의 새 전략에 대해서는 정부 고위 관계자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다. 이번 뉴욕 고위급 회담에 참석한 정부의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4자 회담에 쉽게 응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북한이 최근 제시한 `3+1 형식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면서, 이는 결국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받아낼 것을 다 받아내고 난 뒤 4자 회담에 응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3+1 형식이란 남북한과 미국이라는 3자 회담 구도를 통해 먼저 현안을 타결하고, 여건이 조성된 뒤 중국을 참여시켜 4자 회담을 하자는 일종의 수정안이다. 북한은 이번 뉴욕 협상에서 중국이 남북한을 모두 승인하고 있는데 미국은 아직도 북한에 대한 적대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4자 회담이 열리면 북한이 매우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4자 회담이 제대로 열리려면 미국과 북한이 국교를 수립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국교 수립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미사일·미군 유해·연락사무소 등 미·북한간 현안이 모두 해소된 뒤에 회담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연말까지 미국과의 개별 협상에만 매달릴 듯

이런 관점에서 우리도 이제는 기존 전략을 재검토할 시기가 된 것 같다. 그동안 4자 회담에 대해서는 남북간 모든 현안을 여기에 묶어두고 있는 정부 전략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회의론이 끊임없이 있어 왔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이 현재 요구하는 정부 차원의 식량 지원은 올해뿐 아니라 앞으로 몇년간 매년 백만~1백50만t을 지원해 달라는 것이다. 현재의 시기에서 4자 회담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회의스럽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쌀문제라면 4자 회담과 분리해 별도 협상을 하는 것이 정부 부담도 줄이고 지원할 적기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또 애초의 동기와 목적은 사라지고 마치 4자 회담이 만병통치약처럼 둔갑한 것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북한의 남한 배제 전략을 차단하겠다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다면, 이미 대화의 틀이 확보된 이상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북한의 새로운 협상 전략은 사실상 올해 초부터 기대했던 것만큼 쌀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고육지책의 성격도 띠고 있다. 생각대로 쌀이 구해지지 않으면서 4자 회담 제의를 회피할 수 없게 되자 기왕 할 바에야 최대한 시간을 끌어 많이 받아내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금년 초에 잡았던 정세 일정을 대폭 수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다. 우선 쌀 공급 차질로 인해 권력 승계 일정이 다시 오리무중 상태에 빠져들었다. 또 연락사무소는 금년 초 ‘3월 개설 선언, 5월 개설’이라는 일정을 잡았다가 최근에는 ‘7월 개설 선언, 12월 개설’로 대폭 늦춰졌다고 한다. 또 북한측은 연말까지의 공백기를 미국과의 다양한 협상과 4자 회담 예비회담을 상호 연동하는 형태로 메우려 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렇게 될 경우 6월과 8월께 4자 회담 예비 회담이 두 차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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