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프랑크푸르트·허 광 통신원 ()
  • 승인 1998.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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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소국들, 경제·안보 협력 실패하면 외부 세력에 종속될 위험
중앙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은 국가 주권을 찾는 과정에서 동유럽과 같은 민주화 개혁 운동이나, 과거 비동맹국들이 경험했던 치열한 민족 해방 투쟁을 겪지 않았다. 독립 후에는 소수 민족 간의 갈등이 내전으로까지 확대되고 정변이 되풀이되는 나라가 많았다. 이들이 독립국가연합이라는 틀 속에 머무르며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한 것은 현상 유지를 위해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해외 시장에 접근하는 데 러시아의 수송로를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을 빼고는 이 지역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산업 생산 기반이 마비되면서 과거의 원조를 중단했고, 군대 주둔마저 옛 소련 시대 수준을 겨우 유지할 정도였다. 러시아가 1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지역은 슬라브계 공화국과 카스피 해 주변국들이었다.

중앙아시아 소국들이 눈을 돌린 곳은 터키·이란·파키스탄 3국이 85년에 결성한 3국 경제협력기구였다. 92년에 중앙아시아 7개국이 이 기구에 가입해, 인구 2억7천만 명을 포괄하는 경제협력체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내전 등 정치 불안이 ‘지역 통합’ 걸림돌

그러나 바로 92년부터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에서 내전이 일어나고, 터키와 이란 사이에 이 지역 패권을 둘러싼 마찰이 불거져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 사이 전체 무역 규모는 오히려 뒷걸음치고 몇몇 나라의 경제력은 60년대 수준으로 추락하기까지 했다.

구미와의 협력 관계는 이때 시작되었는데, 유전·천연 가스·금광 등의 자원 개발과 수송을 둘러싸고 구미 기업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부 세력의 지정학적 계산이 숨어 있어, 이 지역의 긴장을 높이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미국 기업은 이슬람 과격파 탈레반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96년 9월 아프가니스탄에 초계정 6척을 무상 지원해, 카스피 해 주변의 무력 증강을 도왔던 것이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내부의 경제 통합이라는 면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성과는 아직 없는 셈이고, 앞으로의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92년부터 내전에 휩싸여 있는 타지키스탄은 여전히 이 지역의 불안 요소로 남아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소프 대통령은 어떤 형태로든 지역 협력 기구를 거부한다는 ‘중립’을 내세우면서 공개적으로는 탈레반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 가스를 파키스탄까지 수송하는 파이프 라인 공사에 자금을 대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안보 협력’이라는 면에서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탄·우즈베키스탄 세 나라 군대로 조직된 ‘평화 유지 부대’가 있다. 하지만 이는 타지키스탄에 대한 군사 개입용으로 구성된 것일 뿐, 지역 협력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전체 주민의 34%가 러시아계라는 사실 때문에, 지역 통합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과거 이 지역을 통치했다는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주변국들의 경계를 받고 있다.

이밖에도 이 지역 국가들이 하나같이 자연 자원 수출과 소비재 수입이라는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도 상호 보완적인 협력을 방해하는 요소다.

중앙아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카스피 해의 국제법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94년 5월 러시아는 이 문제를 다룰 것을 제안하고 의정서를 유엔에 제시했는데, 러시아의 입장은 카스피 해를 ‘호수’로 규정, 각국의 연해 일부를 제외한 중심부는 주변국이 공동으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카스피 해를 ‘대양’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카스피 해는 볼가 운하 등 국제적인 수로와 연결되어 대양으로 통하기 때문에 호수로 볼 수 없다는 견해다. 이란은 러시아의 정의에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대양으로 규정할 경우 주변 나라들이 자국의 해안 크기에 비례해서 카스피 해를 분할 사용할 권리를 갖게 되며, 이 경우 중앙아시아가 독립하기 이전 카스피 해를 공동 사용하던 두 나라의 권리가 축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카스피 해 지위 규정 문제는 각국의 복잡한 이해가 얽혀 있어 완전한 합의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년 간의 협상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7월 투르크메니스탄은 아제르바이잔이 서방 기업에 사용권을 매각한 3개 유전 중 2개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8월에는 러시아에 압력을 행사해 러시아가 아제르바이잔과 맺은 유전 개발 협정을 무효로 돌려놓기도 했다.

외부 투자 없이는 오늘의 낙후한 경제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또한 지역 내부의 협력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외부 세력에 분할 종속될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지역 국가들의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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