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역풍, 미국을 강타하다
  • 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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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침공 명분 없다”…미·영 ‘자충수’ 비난하는 보도 잇따라



최근 유럽에서는 이라크 침공 준비를 다그치고 있는 ‘부시-블레어 사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2월5일, 영국 BBC 방송은 군 비밀 정보부가 3주 전에 블레어에게 보고했다는 이라크 관련 극비 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 조직이 연결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오사마 빈 라덴은 후세인을 이슬람을 배신한 변절자로 보고 있다.


같은 날, 미국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블레어 총리로부터 받은 ‘고급 정보’를 인용해 이라크 응징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브리핑에 맞추어 파월 장관의 논리를 깡그리 부인하는 문서가 흘러 나왔으니 미국으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월6일에는 BBC에 이어 영국의 주요 일간지 <가디언>이 파월 장관의 유엔 안보리 브리핑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파월은 유엔 안보리 회원국 대표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 요르단 출신 테러범 무사브 알 자카비가 후세인 대통령과 접촉했고, 최근 영국 정보부원이 암살된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디언>은 영국 정보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파월 장관의 이같은 발언을 부인했다. 부시 정부가 입증할 수도 없는 내용을 서둘러 꺼냈다는 것이다.


2월7일에는 부시-블레어 팀이 지금껏 꾸며 온 ‘기만 전술’이 들통 나는 일이 벌어졌다. BBC는 이 날 파월 장관이 안보리에서 인용한 ‘고급 정보’가, 사실은 12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생 이브라힘 알 마라시가 작성한 이라크 관련 보고서와 군사 잡지 <제인스 인텔리젠스 리뷰>, 그리고 몇몇 군사 관련 웹 사이트에서 표절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대학생 리포트 ‘고급 정보’로 둔갑


BBC는 이같은 사실을 보도하면서, ‘파월 장관이 심지어 대학생이 보고서에 잘못 쓴 문장 부호나 오자까지 그대로 베꼈고, 단지 온건한 표현을 과격한 말로 바꾸었다’라고 밝혔다. 파문이 확산되자 파월 장관에게 정보를 넘긴 블레어 정부는 ‘여러 곳에서 입수한 정보를 정보부가 충분히 검토해 발표한 것’이라고 우겼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야당뿐 아니라 여당인 노동당에서도 비난이 들끓게 했다. ‘블레어 정부는 이라크 내부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정보망이 없다는 것을 드러낸 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었던 것이다.


바로 이 와중에 오사마 빈 라덴의 육성 녹음이 담긴 테이프가 다시 나타났다. 예전과 다름없이 아랍 방송국 알 자지라가 입수했다는 이 테이프의 일부를 파월 장관은 지난 2월11일 미국 의회에서 공개했다. “영국 정보부 분석과 달리 오사마가 이라크와 연대한다고 발언했으니, 후세인과 오사마가 한통속임이 다시 드러난 게 아닌가.” 파월 장관은 이렇게 말하며 바그다드-알 카에다 커넥션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테이프를 근거로 한 ‘후세인-알 카에다 연계설’은 독일에서도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 독일 정부 대변인은 “이번에도 테이프를 정밀 분석해 보겠지만, 이 테이프가 진짜라 해도 후세인과 오사마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라고 논평했다. 오사마 테이프는 이제 이라크 침공에 요긴한 카드가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의 중동 문제 전문가 숄 래투어에 따르면,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이라크 전쟁 구실을 찾기 위해 남은 카드는 단 하나다. 이미 이라크에 침투해 있는 미국과 영국 특수 부대들이 자기네 생물 화학 무기를 슬며시 남겨 놓고, 이것을 유엔사찰단이 우연히 찾아낸 것처럼 꾸며 전쟁 구실을 만든다는 것이다.


유럽 쪽에서 부시-블레어 팀에게 달갑지 않은 선물을 안겨준 또 한가지 국제 정치적 사건은 슈뢰더 독일 총리와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1월22일 발표한 ‘공동 운명체 선언’이다. ‘독일·프랑스 우호 조약’ 40주년을 기념하는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그 직후 러시아와 중국까지 이라크 전쟁 반대 노선에 합류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유럽연합 15개국 외무장관들도 1월27일, ‘이라크 문제는 유엔에서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해 독일-프랑스 노선에 보조를 맞추었다. 그런데 바로 사흘 후 유럽연합 회원국 5개국과 헝가리·체코· 폴란드의 정부 수반이 ‘세계 안보를 위협하는 이라크 때문에 대서양 연대를 희생할 수 없다’는 이른바 ‘8개국 선언’을 발표했다. 그 직후 미국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유럽에는 낡은 유럽(독일·프랑스 지칭)과 새로운 유럽이 있으며, 미국은 새 유럽을 중시한다’며 ‘8개국의 반란’을 고무·찬양했다. 전문가들은 유럽연합 의장국도 모르게 추진된 8개국 선언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독일·프랑스에 대한 미국측의 비난은 그후로도 이어졌다. 부시 정부 밖에서 초강경 노선을 대변하는 리처드 펄은 “시라크 정부가 이미 레임 덕에 빠진 슈뢰더 정부보다 더 위험하며, 서둘러서 중립화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자기네 동맹에 대한 외교적 결례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더 나아가 “슈뢰더 때문에 손상된 독·미 관계를 복구하려면 독일에 새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라며 일종의 ‘정권 교체론’까지 거론했다. 이것은 베를린 주재 미국대사가 실토한 대로 프랑스·러시아에 이어 중국의 지원까지 확보한 슈뢰더 외교에 부시 정부가 커다란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개전 전야 유럽은 이렇게 술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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