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패권은 ‘내 손 안에’
  • 모스크바·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4.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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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군사기지 건설·경제 투자로 ‘남진’ 가속화…미국과 일전 불사 태세
미국 대선 정국을 틈타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러시아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러시아가 넘쳐나는 오일 머니로 경제 투자라는 당근을 제시하며, 타지키스탄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 좋은 예다. 이로써 9·11 테러를 계기로 새롭게 군사 교두보를 개척한 미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놓고 치열하게 각축할 전망이다. 한편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자신들의 지정학적 위치를 담보로 양측에서 투자를 끌어들여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단꿈에 젖어 있다.

지난 10월 중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중국에 이어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샨베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러시아 군사기지를 설치하겠다고 공식 선언하는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안보를 중시하고 있으며, 내년부터 타지키스탄의 군사 훈련에도 관여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기념식장에는 타지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인 리처드 호그랜드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군사기지 창설에 관한 청사진은 지난 6월 양국 정상이 우크라이나 얄타에서 만났을 때 그려졌다. 당시 에모말리 라흐모노프 타지키스탄 대통령은 경제 지원을 약속하며 러시아 기지 건설을 거부하라고 부추긴 미국의 요구를 묵살하고 푸틴 대통령·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국방장관과 함께 타지키스탄에 러시아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데 합의했다.

타지키스탄에 세워지는 러시아 군사기지의 모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설립된 러시아 201 기계화 보병사단이다. 이 부대는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10여년 동안 고전을 겪은 후 1989년 타지키스탄으로 물러나 지금까지 주둔해왔다. 하지만 양국이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의 합법성에 대해 외교적 합의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내세워

새 군사기지는 5천명의 보병과 공군 비행단, 그리고 우주 레이더 기지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누렉(窓)’이라는 우주 레이더 기지가 주목된다.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에서 남동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레이더 기지는 최첨단 전자·광학 장비를 통해 4만km 떨어진 물체까지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기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동남아시아의 미군 활동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러시아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이 기지 사용권을 얻었다. 이 레이더 기지의 연간 사용료는 단 30 센트(약 3백40원)이며, 앞으로 49년간 러시아가 소유권을 갖는다. 하지만 기막히게 싼 사용료의 이면에는 타지키스탄이 러시아에 갚아야 할 빚 2억4천만 달러를 탕감해 준다는 조건이 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타지키스탄 군사기지는 러시아가 냉전 이후 중앙아시아에 건설한 두 번째 전초 기지다. 러시아는 지난해 키르기스탄에 칸트 공군기지를 세웠다. 그런데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술·전략상 칸트 기지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러시아 군사 전문가들의 지적이 빗발치자, 크렘린은 지난 8월 말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4개국 모임인 중앙아시아협력기구(CACO)에 가입했고, 타지키스탄에 군사기지를 추가로 건설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가속화했던 것이다.

러시아측은 이번 군사기지 건설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리고 ‘주적’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마약 밀매꾼으로 상정했다. 탈레반이 언제 타지키스탄 국경을 넘어 공격해올지 모르고, 이곳 마약 밀수꾼들이 러시아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마약의 70%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이 러시아측의 설명이다. 타지키스탄 정부도 ‘러시아 군사기지는 중앙아시아 안전의 보증 수표’라며 맞장구를 쳤다. 러시아는 또한 타지키스탄 공항을 미국이나 프랑스 공군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독립국가연합(CIS)과 나토와의 파트너십을 위해서 이 기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한마디로 타지키스탄에 러시아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데 테러와의 전쟁 수행 외에 다른 뜻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구실일 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의심하는 전문가도 많다. 한마디로 미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은 중앙아시아 경영을 위한 단계적 이행 방안을 차례차례 실행해왔다.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군사 교두보를 개척해 미군을 주둔시켰고, 아프가니스탄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도록 공을 들여 마침내 친미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내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러시아군의 타지기스탄 진출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간의 힘겨루기 와중에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저마다 실리 챙기기에 부산한 모습이다. 먹고살기 힘든 이들 국가의 최우선 관심사는 경제이다. 타지기스탄은 국민 3명 중 1명이 실업자일 정도로 경제가 피폐한 상태다. 우즈베키스탄이나 키르기스스탄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9·11 사태 이후 우즈베키스탄은 미국에 기지를 빌려주는 대가로 7억 달러라는 막대한 투자를 이끌어냈고, 키르기스스탄도 공항을 빌려주는 대가로 한몫 챙겼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에 바이코누르(우주 공항)를 대여하고 매년 사용료를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키르기스스탄도 러시아에 칸트 공항을 내주는 대가로 경제 협력의 길을 열었다.

“우리는 기지 건설 대가를 비싸게 치렀다”라는 러시아 고위층 인사의 말처럼, 타지키스탄은 러시아에 군사기지를 내주는 대가로 이번에 막대한 경제 투자를 이끌어냈다. 러시아는 타지키스탄에 5년에 걸쳐서 20억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한다.

러시아는 2001년에도 타지키스탄에 한차례 군사기지를 건설하려 했다가 실패한 바있다. 양국 의회 대표단이 만나 군사기지 설치 문제를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협상이 깨진 직접 이유는 타지키스탄이 러시아에 대해 ‘경제 이득은 없이 요구만 한다’고 투덜대면서 러시아측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겉으로는 환영하지만…

반면 이번에는 ‘군사기지와 경제 투자’라는 굵직한 상호 거래가 성사되었다. 러시아통합에너지시스템 회장인 아나톨리 추바이스와 러시아알루미늄 사장인 올렉 데리파스카 같은 러시아 경제 거물들이 협상의 주역을 맡았다. 추바이스는 타지키스탄 내 발전소 건설에 2억5천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데리파스카는 수력 발전소 건설에 5억6천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물을 지배하는 자가 중앙아시아를 지배한다’는 믿음에서인지, 투자 대상은 대부분 수력 자원 개발에 쏠려 있다. 이외에 러시아알루미늄은 앞으로 7년간 6억 달러를 투자해 대규모 알루미늄 공장을 세우겠다고도 약속했다.

미국은 ‘타지키스탄 내 러시아 군사기지는 국제적인 테러와의 전쟁에 탄력을 줄 것’이라며 이같은 거래에 겉으로는 환영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의 타지키스탄 입성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전략과 상충할 것으로 보인다. 석유·가스 자원의 보고인 카스피 해의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의 교량이자 군사적 요충인 중앙아시아를 미국과 러시아 누구도 양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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