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기독교 신학계에 이는 '예수 새롭게 읽기'바람
  • 박성준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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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계 ‘예수 새롭게 읽기’ 새 바람…“역사적 존재로 다시 보자”
한국신학연구소 설립자이자 민중신학자로 이름 높은 고(故) 안병무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역사와 해석〉(1982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서 비판을 무서워하는 것은 오히려 성서에 대한 불신앙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정말 성서가 진리라고 믿는다면 비판을 무서워할 것이 없다. 참 진리라면 아무리 비판하여도 파괴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신앙이 아닐까.’

그의 발언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날 한국의 몇몇 신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다. 이들에게 안박사가 제기한 성서 비판적 읽기는 예수에 대한 비판적 읽기로 치환되고 있다. 내세적이고 초월론적이며 교회 중심적인 신앙을 기본 특징으로 하는 한국 기독교는 최근 나타난 새로운 조류에 당혹해 하고 있다. 일부 신학자들은 특히 ‘죽음과 부활’ 이전의 예수, 즉 역사적 예수의 생생한 모습에서 기성 교단을 비판할 실마리를 찾고 있다.

적어도 국내 기독교계에서 예수는 최근까지도 역사의 지평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교회는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하느님 우편에 앉아 있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자이기도 한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신성 모독이거나 불경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기독교 교단 안팎에서 ‘이제는 인간 예수를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예수를 새롭게 읽으려는 시도는 최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갖가지 화제를 뿌리며 매주 금요일 밤 시청자를 찾고 있는 KBS 제1 텔레비전의 인기 프로그램<도올 논어 이야기>가 진원지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 도올 김용옥씨는 공자의 생애를 설명하며 ‘역사적으로 예수 읽기’의 한 자락을 펼쳐 보였다. 김씨는 자신의 강의에서 예수 당대의 역사 기록 내용에 대한 연구 결과를 들추며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 탄생지가 베들레헴이고 △처녀 잉태로 탄생했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사실 등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 기술’이 아닌, 복음서 기록자의 의도와 목적 의식이 결합한 ‘신화적 기술’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나자렛에서 탄생한 것이 분명하며, 처녀 잉태와 부활은 ‘일반인의 상식적인 인과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사태’이다.

김씨는 공자에 대한 신화를 설명하며 ‘공자에 대한 기록이 예수의 경우보다 덜 신화적으로 보인다고 해서 액면 그대로 사실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예수의 예를 들었지만, 그의 발언은 즉각 파문을 일으켰다. 보수 교단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공영 방송이 특정 종교계를 자극할 수 있는 언사로, 해당 종교와 그 창시자를 비하 또는 매도하는 내용을 여과 없이 방영한 데 대해’ 방송사에 항의했다. 이 사태는 방송사와 프로그램 진행자인 김용옥씨가 한기총의 항의를 일부 수용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은 표현 방식의 과격함(신랄함), 또는 발언하는 자리의 적절함 여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김씨의 이같은 주장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신화를 걷어내고 예수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서양의 경우, 일찍이 1930년대 독일 신학자 불트만이 ‘성서의 비신화화’를 제창한 이래, 신학 방법론의 유력한 갈래로 그 입지를 확립해 왔다는 것이다.
‘역사로서 예수 읽기’의 극단적인 예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시도되어온 ‘예수 세미나’가 대표적이다. 이 연구에 참여한 예수 연구자들의 발언은 도올 김용옥씨의 주장보다 훨씬 더 과격하거나 급진적이다. 리처드 홀슬리는 역사적 존재로서 예수는 ‘팔레스타인 소작농들과 관련된 사회 혁명가’였다고 주장했다. 존 도미니크 크로산은 예수가 ‘소작농을 주된 청중으로 했던 농부였다’고 주장했다. 마르커스 보르그는 예수를 ‘비종말적 사회 예언자’ 또는 ‘카리스마적 치유자’로 해석했다.

이들은 4대 복음서 등 ‘예수 전승’과 관련된 문헌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예수 말씀’을 진정성 정도에 따라 네 가지 다른 색깔의 구슬로 분류하는 작업도 벌였는데, 그 결과 또한 충격적이었다. 종말·최후의 심판·재림 등 이제껏 예수 그리스도를 대변해온 ‘말씀’들은 대개 검정색 또는 회색 구슬을 받았다. 예수 자신의 발언이라고 보기에는 신빙성이 아예 없거나 낮은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즐겨 애송되는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그 역사성이 부인되었다. 복음서 예수 전승의 18%만이 진정성을 인정받는 붉은색·분홍색 구슬을 받았다.

반면 ‘오른 빰을 치면 왼쪽 뺨을 대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등 경구(아포리즘)로 익히 알려진 예수 말씀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즉 ‘역사적 예수’는 당대 민중에게 지혜의 말씀은 던져주었을지언정, 스스로를 심판자나 메시아로 내세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예수를 역사적 존재로 파악하려는 흐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민중신학을 대표하는 안병무 박사(1996년 작고)의 작업은 그 중 선구적 시도로 꼽힌다. 예수의 민중성에 주목한 그는, 역사적 예수의 참된 모습을 ‘사건’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자 했다. 그 결과 안박사는 예수가 어떤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는 불특정한 무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유명한 ‘오클로스론’을 도출했다.

안박사의 민중신학은 후계자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는데, 이들은 기존 민중신학 이론에 미국에서 바람을 일으킨 예수학의 성과를 접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국내에 ‘예수 역사학’이라는 신조어를 등장시킨 김진호 목사(한백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는 미국에서 수행된 ‘역사로 예수 읽기’의 성과를 일면 긍정하면서도, 이를 민중신학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재음미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예수 연구는 예수의 말씀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유학해 최신 연구 성과를 세례받은 일군의 신학자들은 또 다른 맥락에서 ‘역사로 예수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수 운동, 그리스도교 기원의 탐구〉를 펴냈고, 〈뒤집어 읽은 신약성서〉에 공저자로 참여했던 조태연 교수(이화여대·기독학)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조교수가 역사적 예수에서 읽어낸 것은 ‘방랑자 예수’이다.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있기 전 예수는 끊임없이 방랑하며 소외된 사람들과 생활했는데, 이것이 바로 말씀의 과격성과 행위의 파격성, 그리고 당대 통념의 전복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조교수는 “흔히 예수 연구는 예수의 역사적 성격과 메시아적 성격을 뭉뚱그려 ‘그리스도론’ 또는 ‘기독론’으로 통칭해 왔는데, 앞으로는 양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의 신성성이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내용이나 지향은 조금씩 다르지만 현재 신학계 일각에서 번지고 있는 예수 재발견 작업은 궁극적으로 한국 교회의 잘못된 신앙 구조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한국 교회는 그동안 지나치게 ‘신앙 지상주의’ ‘묵시 종말론적 내세 신앙’ ‘초월 신앙’ 쪽에 기울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의 새로운 예수 읽기 시도에 대해 기성 교단, 특히 보수 교단이 보내는 눈길은 냉담하다. 이들은 아예 새로운 예수론을 ‘극소수 학자들의 견해일 뿐, 기독교계 전체의 보편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치부한다. 한기총의 한 간부는 “예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어떤 제약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질문을 기독교에서 절대적인 부분인 구세주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반대로 일부 종교학자들은 소장 연구자·목회자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새로운 방식의 예수 읽기를 옹호하며, 보수 교단의 이같은 논리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억지라고 비판한다. 한국 교회는 성서 또는 예수를 적힌 그대로 읽는 재래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교회의 절대 권위를 유지하는 기제로 그리스도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계 주류의 편협한 태도에 소장 종교학자 장석만 박사(한국종교연구회 회장)가 던지는 다음과 같은 논평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개인적으로는 예수 읽기에 찬동하면서도 불이익을 당할까 무서워 침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한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신앙을 앞세워 이성을 죽이는 식의 신학은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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