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짝
  • 김미현 문학 평론가 (penovel@hitel.net)
  • 승인 2000.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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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키치 문화는 저급한 것의 대중화를 통해 하향 평준화나 비속화만 가속화하는 측면이 있다. 촌티가 나지 않는 세상도 숨막히지만 촌티만 나는 세상은 너무 가볍다.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4천원짜리 원두 커피를 먹어도 2백∼3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꼭 다시 빼먹는다. 이런 나를 보고 주위 사람들은 촌스럽다고 놀리면서도 은근히 좋아한다. 고상한 척하더니 별 수 없다는 뜻일 게다. 하기야 나도 중국집에서 나오는 단무지를 무척 좋아하는 부잣집 친구를 보고 그 소탈함에 후한 점수를 주었었다. 사람들은 촌스럽거나 유치한 것, 싸구려에 대해 무조건 무장 해제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황신혜가 손으로 김치를 집어먹으면 개그우먼 서춘화가 그러는 것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인 듯하다.

최근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테크노 뽕짝 가수 ‘이박사’도 외모·의상·음악 모두 무척 촌스럽다. 단순하다 못해 유치하다. 관광버스용 음악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싸구려 냄새도 난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이 더 그의 ‘호리호리’ ‘아싸’ ‘우리리리히이’ 같은 추임새에 자지러진다. 그가 나오는 유치 찬란한 광고들도 엄청 분위기를 잡는 다른 광고들과 차별화되어서인지 인지도가 아주 높단다. 그의 이런 음악을 본뜬 영화 <거짓말>과 <반칙왕>의 음악도 인기였다.

이 ‘박사답지 않은 박사’에게 열광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촌스러움’이 아닐까. 사람들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에 싫증이 난 상태이다. 자로 잰 듯하거나 깎아놓은 밤 같은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그들의 품격을 깨뜨리는 게릴라가 나타난 것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저 부담 없고 편안하게 즐기면서 웃으면 된다.

11월7일에 치러지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후보인 고어와 부시에 대한 지지도의 변화에서도 비슷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두 후보는 최근에 끝난 세 차례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1승1무1패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경험과 지식과 다변으로 무장한 고어가 그렇지 못한 부시에게 압승할 것이라던 예측이 빗나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고어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고어가 과장이나 윤색을 일삼는 허풍쟁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혹시 능력은 부족해도 인간적으로 보이는 부시가 호감도나 신뢰도에서 앞선 것은 아닐까. 때문에 고어는 1차 텔레비전 토론회 때는 토론에서 이기고도 지지율이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촌티는 귀티·부티와 함께 있어야 진가 발휘

사실 부시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영어 환자)라고 불릴 정도로 영어 사용에 실수가 잦다. 고어에 비해 무식한 그가 미국을 대표할 수 있을지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웃집 아저씨같이 수더분하고 솔직한 서민적 이미지가 강점으로 꼽힌다. 박학다식하지만 교만하고 공격적이어서 정이 안가는 고어의 모범생 이미지에 비하면 더 친근하다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서조차 모자람이나 촌티에서 오는 인간적인 매력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촌스러움에 대한 관용이나 포용에서 된 사람·든 사람·난 사람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세련되거나 우아한 것들과 촌스럽거나 저속한 것들을 나누는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몸짓, 엄숙주의나 권위주의를 거부하려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더 이상 착하고 똑똑하며 성공한 삶이 성취 모델이 아니다. 오히려 대중은 실수도 저지르고 잘난 척하지 않는 사람을 더 선호한다.

이른바 ‘이발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키치(kitsch)’는 독일어로 경박하거나 저속한 작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지배 문화나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과 함께 고급 문화를 같이 즐기자는 대중화 욕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키치 문화는 저급한 것의 대중화를 통해 하향 평준화나 비속화만 가속화하는 측면이 있다. 촌티가 나지 않는 세상도 숨막히지만 촌티만 나는 세상은 너무 가볍다. 그리고 촌티는 ‘귀티’나 ‘부티’와 함께 있어야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다. 황신혜와 서춘화처럼. 그러니 이런 촌스러움의 문화가 가볍다거나 퇴행 욕구와 다름없다거나 하는 혐의나 오해를 벗기 위해서는 이박사의 노래와 함께 헨델의 협주곡도 들어야 한다. 부시의 유머에 웃기도 해야 하지만 고어의 딱딱한 설명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안티 문화이다. 적을 알지 못하면 이길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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