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성계,마루야마 마사오 읽기 붐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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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일본의 근대> 등 이론서·평론집 번역 출간 잇달아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일본 지성계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1996년 타계할 때까지 일본 국내는 물론 국제 일본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그가 최근 한국의 지성계에 ‘마루야마 읽기 붐’을 불러일으켰다. 득의의 저작 〈일본정치사상사 연구〉(1952년)의 한국어판(김석근 옮김·통나무 펴냄·1995년 초판 발행)이 나오면서부터였다.

학문적 자존심으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도올 김용옥씨(전 고려대 교수)조차 해제문 첫머리를 ‘내 어찌 위엄 서린 마루야마 선생의 치열한 붓길 앞에 소략한 일필의 궤적을 가하랴’라는 최대한의 겸사(謙辭)로 시작했던 책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는, 현재 재판 3쇄가 나와 있다. 학술서로는 보기 드문 반응이다. 마루야마의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1997년) 역시 딱딱한 사회 과학서이지만 3쇄를 찍었다.

이밖에도 지난 1998년에는 ‘마루야마학(學)’의 주요 줄기를 이루는 〈일본의 사상〉(한길사) 〈충성과 반역〉(나남) 등이 앞다투어 번역되어 나왔지만, 마루야마학의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아직 멀었다(일본에는 전 16권과 별권 1권으로 〈전집〉이 나왔음).
최근에는 그가 죽기 전, 일본의 원로 평론가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와 함께 ‘일본의 근대’를 여는 데 핵심 역할을 한 번역 작업의 내면을 대담 형식으로 파들어간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가 나왔다. 이 책은 원래 일본의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이 〈일본근대사상대계〉(전 23권) 중의 한 권인 〈번역의 사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마루야마가 가토와 편집의 기초 작업으로 의견을 주고받은 대화를 녹음 테이프로 기록한 것이다. 이와나미측은 이 녹음 테이프가 그대로 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출판했다.

이 책이 기왕 국내에 소개된 마루야마 저작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본격적인 학술 논문이나 저작이 아니고 일반 독서 대중을 겨냥한 교양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와나미측이 스스로 밝혔듯이 ‘자유롭고 활달한 대화가 무척 흥미로워’ 출판이 결정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결코 가벼운 것만은 아니다. 마루야마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 자신이 ‘일본 근대 정치의 발견자’라고 명명했던 오규소라이(荻生俎徠)가 활약했던 시대(17세기 말~18세기 초)로부터 서양 책 번역이 일대 봇물을 이루던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약 2백 년간 일본 번역의 역사를 일별하며, 서양의 근대 문명 자체를 통째로 ‘번역’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일본 사상계의 특징을 ‘능숙한 솜씨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저작의 대부분을 번역해 국내 학계에서 마루야마 소개 작업의 선봉장 구실을 해온 김석근 박사는 마루야마 읽기의 주요한 시사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 마루야마는 서양 사상에 관한 한 비서양권에서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일본의 사상적 특질을 서양권에 요령 있게 전달하는 데 누구보다도 탁월했다는 점이다. 도쿄 대학 법학부 교수를 지낸 마루야마는 자신이 이룩한 스칼러쉽을 미국 하버드·프린스턴·캘리포니아(버클리), 영국 옥스퍼드 등 세계 유수 대학의 강단에서 전파했다.
다른 하나는, 마루야마가 서양을 ‘학습’한 것 이상의 수준으로 일본의 사상적 전통에 정통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도쿄 대학에서 ‘동양 정치 사상’을 강의한 최초의 교수로 꼽힌다. 처음 도쿄 대학 안에 학과를 개설할 때(1936년) ‘국민 윤리’와 비슷했던 ‘일본 정치(사상)학’을 전후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과로 독립할 수 있게 만든 것도 마루야마의 공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루야마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겉모습이 아닌 정신으로서 ‘근대를 읽는 방식’이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근대(지상)주의자로 꼽힌다. 마루야마가 ‘마루야마 덴노(天皇)’로 불리며 ‘일본의 양심’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오규 소라이의 ‘근대 정신’으로 전후 일본 사회에 만연한 군국주의의 찌꺼기들(주로 ‘근대 초극론’으로 불렸음), 즉 봉건성과 불합리성을 통렬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마루야마를 읽으려는 한국의 지성계는 또 다른 관점에서 그를 주목하고 있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받아들인 한국 지성계의 처지에서 보자면, 마루야마는 따라 배워야 할 선생인 동시에 뛰어넘어야 할 산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근대의 겉모습만을 읽어온 우리에게 마루야마는 진정으로 배워야 할 거장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마루야마를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자칫 서양을 대전제로 한 일본의 근대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김석근 박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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