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그리고 위대한 거짓말
  • 김미현 문학평론가 (penovel@hitel.net)
  • 승인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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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솔직한 사람이 좋다. 하지만 솔직해져야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더 좋다. ‘솔직히 말하면∼’으로 시작되는 말은 모두 고해성사에 가까우니까. 그러나 인간의 삶 자체가 실수와 잘못의 연속이니 솔직해져야 할 일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평균 8분에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통계도 있다.

그런데 솔직한 ‘참말’과 솔직하지 못한 ‘거짓말’ 사이에 ‘새빨간 거짓말’(영어식으로 말하면 ‘새하얀 거짓말(white lie)’이 있다. 그리고 문학 작품은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공식화·합법화하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허구이면서도 허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이런 ‘위족(僞足)’이나 ‘허족(虛足)’으로서의 문학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은 현실이 고통스럽거나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싶은 작가들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안데르센·이솝·생텍쥐페리는 솔직하기 싫었거나 솔직하지 못했던 작가들에 해당한다.

안나 이즈미가 쓴 <안데르센의 절규>(황소연 역, 좋은책만들기)를 읽으면, 불행했던 안데르센의 일생이 정반대로 나타난 것이 그의 아름다운 동화임을 알게 된다. 안데르센은 가난한 집안에서 ‘덴마크의 오랑우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못생기게 태어났다. 그래서 많은 여성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한 여성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동정(童貞)을 지닌 채 죽었다. 게다가 정신병으로 죽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성적으로 문란해 사생아를 낳았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매춘업을 했던 숙모 등으로 얽힌 가계(家系)는 그를 평생 괴롭힌 업보였다.

한스 요아힘 셰틀리히가 10세기께 익명의 작가가 쓴 글을 토대로 다시 쓴 <자유인 이솝>(전재민 역, 참솔 펴냄)에도 이솝의 불행했던 삶이 드러나 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의 초상화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솝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노예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노예로 천대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언어와 기지와 지혜로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웃는다. 계몽적이고 합리적인 그의 우화 밑바닥에는 외모 때문에 자기를 멸시하고 자기의 이성만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세상에 대한 야유와 공격이 도사리고 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도 이 동화에서 자신의 부인인 콩쉬엘로를 모델로 한 장미를 등장시킨다. 그에게 장미는 보살핌이나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길들임, 즉 관계 맺기를 통해 절대화하는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콩쉬엘로가 직접 쓴 <장미의 기억>(김선겸 역, 창해 펴냄)을 보면 생텍쥐페리가 자신의 글처럼 책임감이 강하거나 관계 맺기에 충실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잦은 비행(飛行)이나 사고로 인한 부재와 불안, 돈 후안적인 기질로 인한 불륜 등으로 고통받았던 콩쉬엘로의 내면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플렉스를 ‘거짓말’로 승화시킨 안데르센·이솝·생텍쥐페리

가면을 가리키는 ‘퍼소나(persona)’라는 말에서 인격을 가리키는 ‘퍼스낼리티(personality)’라는 말이 나왔다니 사람은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떤 가면을 쓰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가면’에 해당하는 거짓말을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할 것이다. 거짓말에는 새빨간 거짓말뿐만 아니라 ‘시커먼’ 거짓말도 있기 때문이다. 새빨간 거짓말은 거짓말임을 드러내면서 오히려 진실을 부각한다. 그래서 세상을 투명하게 해준다. 그러나 시커먼 거짓말은 참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그래서 나는 솔직함을 가장하는 솔직함이 더 무섭다. 솔직함의 가면을 쓰면 모든 것이 용서될 뿐더러 심지어 용기 있다고 칭송받기까지 한다. 잘못된 솔직함은 가학과 공격에 가까운 ‘폭로’인데도 말이다. 솔직하지 않아야 더 좋을 때, 인격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가면을 써야 할 때, 자신의 콤플렉스를 승화시켜야 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새빨간 거짓말이 아닐까. 안데르센이나 이솝이나 생텍쥐페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문학이 ‘위대한 거짓말’인 것도 이런 솔직함이 절제되고 승화된 것이기 때문이므로. 지금의 우리 문화는 비문학적인 시커먼 거짓말에 너무 상처를 입었으므로. 진정한 인격의 고수(固守)나 고수(高手)는 가면을 벗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가면으로 자꾸 바꾸는 것에서 생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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