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가려운 곳 긁는 ‘학교 밖 학교''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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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문학학교 등 ‘고품격’ 사설 강좌 개설 붐
지식인의 작업 동선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 지식인 하면 보통 대학 강단에 선 모습을 연상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요즘 지식인의 발걸음은 다른 데로 향하고 있다. 지식인에게, 특히 인문학 분야를 공부하는 지식인에게 대학은 점점 더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옥죄는 족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부 지식인은 벌써 상아탑에서 벗어나 ‘저자 거리’로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바로 거기에서’ 이들은 사제 간의 진지한 만남과, 진정한 학문적 대화, 그리고 참된 교육을 꿈꾼다.

〈시뮬라크르의 시대〉 〈접힘과 펼쳐짐〉을 쓴 이로 잘 알려진 이정우씨(전 서강대 교수)는 이같은 꿈을 현실로 옮기고 있는 사람이다. ‘숨 막힐 정도로 위계화한 대학 사회의 질서가 싫어’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는 그는, 얼마 전 서울 인사동에 자신의 학문을 실현할 작은 요람을 마련했다. 이석호·이봉재(서울산업대)·홍준기·조광제·김석수(서경대) 씨 등 대학 강단 안팎에서 활약하고 있는 소장 연구자들도 합류했다. 이들이 모여 만든 요람의 이름은 ‘철학아카데미’(대표 조광제)이다.

4월10일 문을 연 철학아카데미는 현재 수강생 수가 60명 남짓한 작은 학교이다. 강좌 수도 적다. 철학아카데미가 당초 계획한 강좌 수는 모두 8개였는데, 6개로 줄었다. 철학아카데미의 존재가 미처 덜 알려진 탓에 수강 신청자가 적어 자진 폐강했기 때문이다.

철학아카데미에서 ‘교수들’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강의하고(홍준기), 철학의 눈으로 영화를 보는 법도 가르치며(조광제),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을 읽어주기도 한다(이정우). 김석수 교수(서경대·철학과)는 매주 화요일 이곳에 나와‘한나 아렌트와 정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서양 정치 철학을 강의한다.

물론 강의 수준이나 방법은 학생의 수강 능력이나 요구에 따라 달라진다. 이른바 ‘일반 강좌’와 ‘전문 강좌’로 강의 과목을 나누어, 전문 강좌의 경우는 특별히 상담을 통해 수강 신청을 받는 외에, 강의 내용도 일반 강좌와 달리하는 것이다. 대학으로 치자면 일반 강좌는 교양 과목에, 전문 강좌는 전공 과목에 해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철학아카데미에서 정작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강의에 참여하는 소장 연구자들의 당찬 도전 의식과 실험 정신이다. 이들은 기성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제도권 철학을 ‘죽은 철학’이라고 규정한다. 아울러 이들은 철학이 제도권에 갇혀 있는 한 소생할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들은 ‘죽은 철학을 살아 있는 철학으로 대치하기 위해’ 상아탑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선 셈이다.

학교 밖의 학교를 통해 죽은 학문 또는 죽어가는 학문을 되살리려는 시도는 철학계에만 그치지 않고 인문학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시인 김정환씨가 소설가 이문구·김주영·김원일 씨 등 문단의 ‘어른’들을 모시고 벌써 10여 년째 문학 지망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한국문학학교는 문학판의 대표적인 사설 교육기관으로 꼽힌다. 건축학계의 작업도 활발하다. 조성룡·김 원·승효상 씨 등 중진 건축가들과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박길룡(국민대) 등 건축과 교수가 주축이 되어 ‘좋은 건축가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는 서울건축학교는 정규 교과 과정을 시작한 지 올해로 4년째를 맞아 본격적인 도약을 꿈꾸고 있다. 운동권 이론가에서 학인으로 변신한 이진경씨는 신세대 문학 평론가인 고미숙씨와 손잡고 지난해 8월 자기네 연구 모임인 수유연구소 안에 인문학을 주제로 한 세미나 식 강좌를 신설했다.

학교 밖의 학교는 ‘전문성’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사 문화센터의 교양 강좌와 대별된다. 서울건축학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최근 일반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개설해 문호를 넓혔지만 설립 초부터 주로 건축과를 졸업하고 설계사무소 등에서 실무에 종사하는 건축인을 대상으로 한 ‘재교육 기관’임을 자처해 왔다.

교육 방침은‘안 되면 될 때까지’

이 학교의 설립 취지는 ‘훌륭한(성공한) 건축가’ 양성이 아니라 ‘좋은 건축가’ 양성에 있다. 교수진은 학생들을 좋은 건축가로 이끌기 위해 이들에게 설계 실무는 물론 예술사·철학·미학 등 건축학과 밀접한 인문학을 연마하라고 요구한다. 인문학 수련은 기술 교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대학 강의에서는 특히 소홀히 취급되던 분야다.

인문학 수련을 중시하는 학교측 노력은 학사 진행 방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예컨대 학생들은 보통 1년을 3학기로 하여 6학기 교과 과정을 이수하면 졸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말만 졸업장이 있을 뿐이지 지금까지 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교장 조성룡씨(조성룡도시건축 대표)의 설명이다. 그만큼 이 학교는 단순한 실무 교육보다는 건축가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 함양에 힘을 쏟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문학학교의 경우는 애초부터 싹수가 보이지 않는 문학 지망생은 아예 받아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학교의 수업은 철저하게 도제 식으로 이루어진다. 소설반·시반·방송극본반에 소속된 학생들은 무조건 담당 교수에게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데, 글을 써오지 않는 학생은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을 정도이다. “우리 목표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가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도제식 교육을 통해 진정한 문학인을 길러내는 것이다”라고 이 학교 교장 김정환씨는 말한다.

이런 사정은 최근 강좌를 개설한 수유연구소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유연구소는 원래 세미나·독회·발표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소장 인문학 연구자들의 전문 연구 모임이었다. 이 모임이 연구 기능에 강의 기능을 추가한 때는 지난해 8월. 대학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연구 분위기를 살려 ‘가르치며 배우는’ 이중 효과를 거두어 보자는 취지로 강좌를 열었다. 현재 수유연구소는 ‘철학’ ‘근대 계몽기의 수사학’ ‘고전의 횡단적 독해’ ‘필로시네마’ 등 네 강좌를 개설해 교수와 학생이 서로 가르치며 배우고 있다.

4~5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 바깥에서 이같은 사설 교육기관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민예총이 주관하는 문예아카데미, 10여 년 전 독서 모임으로 출발해 전문 강좌로 성장한 열린사회아카데미 정도가 그나마 알려져 있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동양학 분야에서는 얼마 전 ‘노자와 21세기’라는 방송 강연으로 화제를 모았던 도올 김용옥씨의 도올서원이 대표적이다.

학교 밖 학교가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인문학계 전반에 불어닥치고 있는 위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학부제 시행 이후 대학에서 ‘돈 안되는’ 인문학은 찬밥 신세를 면하기 어려워졌다. 학계 내부에서도 지나친 전공 장벽, 한정된 교과 등은 학문 발전을 가로막는 중대한 걸림돌로 지적되어 왔다. 대학 사회에서 ‘경쟁력’ ‘생존’ 따위 낱말이 강조되면서 교수들의 능력은 질적인 수준보다 양적인 실적으로 평가되기 일쑤였다. 결국 학교 밖의 학교에는 연구자들 스스로 위기에 대응해 자구책을 찾으려는 성격과, 기존 교육 구조의 학문적 폐쇄성을 시정하려는 성격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최근 문을 연 학교 밖 학교가 저마다 ‘개방성’ ‘가로지르기’ ‘학제 간의 벽 허물기’ 등을 강좌의 1차 목표로 삼는 까까닭도 여기에 있다. 해당 분야 전문가를 초빙해 매주 강의를 진행하는 서울건축학교의 ‘금요 강좌’에는 올해 들어서만 이영미씨(대중 음악 평론가)·김홍준씨(영화 감독)·박영택 교수(경기대·미술학부)·고길섶씨(문화 평론가) 등 인접 학문 분야의 ‘비건축도’들이 강사로 다녀갔다. 철학아카데미에서는 프랑스 철학을 공부한 조광제씨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감각의 제국〉 〈강원도의 힘〉 등 영화 8편을 철학의 잣대로 분석하고 있다. 수유연구회는 ‘근대 계몽기의 수사학’이라는 강좌를 통해, 한국 근대 시기의 잡지·소설·신문 등 남들이 좀처럼 손대지 않았던 자료를 들추고 있다.

소장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탈학교’ 시도에 주변의 동료들은 반색하고 있다. 이같은 시도가 ‘학문=대학’이라는 등식을 깨고, 획일화한 지식 전달 통로를 다양화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학교 바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는 모습은 학교 안 동료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초심 지키기’가 생명력 유지 열쇠

하지만 일부 동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신중론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운영되는 학교가 소규모일수록 운영자 자신의 성향이 강좌 개설에 직접 투영되기 마련인데, 이럴 경우 전체 강좌가 자칫 균형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을 전공하고 문화 평론가로 활동하는 강유원씨는 철학아카데미의 경우를 예로 든다. “이 모임은 강좌가 미시적 담론 위주로 개설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거대 담론이 빠진 부분은 철학아카데미의 선구적 의미와는 별개로 오늘날 철학계에 부과된 과제가 무엇인가 하는 차원에서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비슷한 성격의 학교가 우후죽순 격으로 난립할 경우, 지식 시장의 수요자를 둘러싼 학문 외적 경쟁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물론 현재까지 이같은 우려가 현실화할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컨대 학문적 열정이라는 ‘초심’을 얼마나 유지하느냐가 이들 학교의 생명력을 가름할 관건인 셈이다.

지난 10년간 숱한 어려움 끝에 문단에서 ‘작가 양성 기관’ 자리를 확실하게 굳힌 한국문학학교 김정환 교장의 경험담은 이 대목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학교를 시작할 무렵 비슷한 성격의 기관 4~5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문을 닫았다. 우리는 이같은 결과를 목격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학교를 지탱해 줄 권위는 처음 설정한 원칙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지켜가느냐에 달렸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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