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동안거…오묘한 ‘선의 세계’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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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4천여 스님 용맹정진…‘불교는 중생에게 무엇인가’ 답변 내놓아야
음력으로 매년 10월 보름이면 스님들은 행장을 챙겨 전국 사찰의 선원, 이른바 ‘선방(禪房)’으로 몰려간다. 불가에서 오랜 전통이 되어온 겨울 안거(安居)를 위해서이다. 여름과 겨울 두번에 걸쳐 진행되는 안거(하안거·동안거)는 불가에서, 특히 수행의 방법으로 참선(參禪)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한국 불교에서 현재 가장 중요한 연례 행사이자 뿌리 깊은 전통 중의 하나이다.

안거 기간(결제 기간이라고도 함), 스님들은 산문(山門) 바깥 출입이 일절 금지된다. 아울러 외부인의 선방 출입도 엄격하게 제한된다. 안거에 든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은 ‘부처의 심법을 실참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 쉽게 말하면 오로지 참선 정진에만 매달려 스스로 부처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안거 때 선방 스님에게 적용되는 규율이 얼마나 까다로운가 하는 것은, 경허·용성·한암·효봉·동산·금오·법정 스님(97쪽 조계종 법계 참조) 등 한국 불교계의 내로라 하는 선승이 자취를 남긴 쌍계사 금당선원의 청규(淸規·선원 규칙)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결제 기간에 스님은 텔레비전·신문·잡지를 볼 수 없다. 아울러 허용된 때가 아니면 말을 해서도 안된다. 이른바 ‘묵언(默言)의 원칙’이다. 결제 중 삭발 목욕·산행·법요식을 제외하고는 자유 정진을 할 수 없고, 옷과 가사(장삼 위에 걸쳐 입는 법복)·발우(바리·밥그릇)말고는 개인 사물을 들여놓아서도 안된다.

결제 생활은 이처럼 철저하게 짜인 시간표에 따라 일거수 일투족이 제약되는 긴장과 강제의 연속이다. 그래서 때로 일부 수행자는 ‘철의 규율’을 이기지 못해 선방을 뛰쳐나간다.

산사에는 올해에도 예외 없이 동안거를 위한 수행자의 발길이 찾아들었다. 결제일은 11월22일. 조계종 교육원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올해 선방으로 들어간 스님은 전국 24개 교구 본·말사에 딸린 선원 70여 곳에 2천여 명이다. 이밖에 선방에는 들지 않았으나 암자 또는 토굴을 찾아 개별적으로 정진에 나서는 스님까지 합치면 4천명이 넘는 스님이 안거 때마다 수행 대열에 합류하는 것으로 교육원은 파악하고 있다. 한국 불교에서 겨울은 수행의 계절이다.

스님들의 수행은 간경(看經)·참선·염불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한국 불교에서 수행은 유독 참선, 그 중에서도 간화선(看話禪)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간화선이란 화두(話頭)를 참구하고 타파하여 진여불성(眞如佛性·참된 불성)을 깨닫는 참선 수행 방식이다. 여기서 화두란, 깨침을 판단하고 지극한 이치를 드러내는 말귀·문답·동작을 말한다.

한국 불교에 간화선이 지배적인 전통으로 자리잡은 까닭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나 태고 보우 이래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역대 명승의 영향이 컸다. 이들이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깨달음[敎]보다 내면 성찰을 통한 깨달음[禪]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안거가 이루어지는 선방은 이같은 간화선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현장이다. 오늘날 선방에 들어간 스님은 모두 저마다 ‘깨뜨려야 할’ 화두 하나씩을 붙잡고 안거 기간 내내 씨름하는 것이다.

한국은 간화선 전통을 한·중·일 동양 3국 중 가장 온전하게 지켜오고 있다. 미국·캐나다 등 서양에서는 물론 심지어 간화선의 종주국이라 할 중국에서조차 스님이 한 수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한국의 절을 찾기도 한다. ‘(대자유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부모를 만나거든 그들도 함께 베어라’고 말한 중국 당나라 때의 임제 의현(臨濟 義玄:?~867)이 간화선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그의 일갈이 천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참선의 참뜻 실현하고 있는가”

그런데 최근 불교계 안팎에서 사뭇 다른 기류가 감지된다. 그간의 참선 방식이 전통을 지키는 데에만 얽매여 선의 참뜻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이다. 문자와 언어에 부정적인 선 수행 체계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흘러 객관적 규범성을 해치는 폐단을 드러낸다는 지적도 있다. 더 나아가 선에서 말하는 화두가 너무 초월적이고 추상적이어서 현실을 살고 있는 중생(衆生)을 외면하는 것 아니냐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며, 일부 비판자 가운데에서는 ‘한국의 화두는 무늬만 화두일 뿐이지 실제로는 죽은 화두’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알지 못할 선문답에 빠진 이와 같은 전통이 한국 불교의 미래를 암담하게 한다는 것이다.

간화선 중심의 불교 전통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올해 초 소장 철학자인 한형조 교수(정신문화연구원)가 〈벽암록〉과 함께 불교계의 대표적인 공안(公案·선사들의 화두 해설집)을 모은 〈무문관〉(중국 남송 때 스님인 무문 혜개가 지음)을 해설한 책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를 펴내면서 시작했다. 한교수의 책이 심상치 않았던 까닭은 그가 〈무문관〉을 해설하면서, 또는 중국에 불교를 전한 달마 이래 중국 역대 조사(祖師)의 언설을 재해석하면서 선가에서 두고두고 논쟁점이 되어온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절집에서 보통 ‘몰록 깨침’으로 번역되는 돈오는 ‘단 한순간에 일어나는 깨침’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임제종(임제의 종지를 근본으로 하여 일어난 종파) 이래 간화선의 표어가 되었다. 점수는 수련을 통해 돈오를 보완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한교수는 〈무문관〉을 재음미하며, 돈오가 ‘과잉’한 것이 불교를 ‘말아먹을’ 수도 있음을 지적하며 불교의 위기를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한교수는 “돈오 과잉은 불교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그만큼 위험한 교설이다. 이를 중재하기 위해서라도 점수와의 균형은 필수이다. 조계(중국 불교의 6대조로 꼽히는 혜능이 37년간 머무르며 선을 전파한 중국의 한 지명)의 선을 표방하는 한국 불교의 과제도 여기에 있다. 선을 넘어서 다시 교와 손잡고, 떨친 언어와 논리와 상식을 다시 불러오며, 사제 혹은 문중의 사적 전승이 아니라 대중적 교육의 커리큘럼을 마련하며, 주관적 개성를 넘어 객관적 규범에 헌신하는 풍토를 정착시켜야 한다. 그 혁명적 결단에 한국 불교의 미래가 걸려 있다”라고 외쳤다.

한교수의 이같은 문제 제기는 〈불교신문〉을 통해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한교수의 선관에 대해 현웅(미국 육조사)·종호(동국대 선학과) 스님 등이 신문사에 반박 편지를 띄우면서 간화선 전통에 대한 문제 제기가 지상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논쟁이 달아올라 이 문제는 심지어 결제 중인 선원의 지대방(수행자들이 한담을 나누는 곳)에서조차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한국 불교의 ‘배타성’ 극복해야

선가가 중시하는 화두의 위력은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데 있으며, 이를 촌철살인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 있다. 그래서 중국의 유명한 선승 운문은 부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심지어‘뒷간의 똥막대기’라고 대답했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하는 석가를 때려잡아 굶주린 개에게 던져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화두는 처음부터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권위(언어)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언어를 동원해야 하는 숙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한국 불교가 현실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문제 의식, 즉 ‘활구(活句)’를 찾아나서는 데 실패하고 화석화한 ‘깨달음’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계는 한교수의 문제 제기를 ‘성급한 판단’이라고 평가 절하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한교수의 지적에 적지 않게 아파하는 표정이다. 비록 불교계는 문제가 돈오 과잉이 아니라 돈오 부족에 있다고 반박했지만, 오늘날 불교가 인간 소외 등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에 마땅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한교수의 주장에 공감을 표시하며 한 발짝 물러선 것이다. 논전에 참여했던 종호 스님은 “백양사 서옹 스님의 ‘참사람 결사 운동’ 등 선의 내용을 시대에 맞게 채우려는 노력이 불교계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 불교의 미래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라고 인정한다.

선 중심의 한국 불교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다른 경로로도 제기되고 있다. 각종 선어록에 대한 치밀한 언어학적 재해석을 통해 ‘기존 통념과 달리 선이야말로 가장 현실적·구체적인 깨달음의 방식이었다’고 주장하며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신규탁 교수(연세대·철학과), 〈금강경〉을 풀이하면서 ‘아상(我相)에만 집착하는 한국 불교가 점점 배타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도올 김용옥씨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아예 공개적으로 이같은 한국 불교의 전통을 줄기차게 비판하겠다고 선언한 전문 잡지도 등장했다. 지난 11월 창간된 〈불교 평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잡지는 창간호에 ‘20세기 한국 불교, 그 사상적 흐름은 무엇이었나’라는 좌담 기사를 실었다. 이 특집에서 참석한 전문가들이 선 중심의 불교 전통과 그 문제점을 집중 거론했음은 물론이다. 논의된 내용을 요약하면 ‘선 중시 사상은 불교계 안에서는 기본적인 교리 공부마저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바깥으로는 불교계 전체를 낙후한 집단으로 인식시켜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가(禪家)에는 전통적으로‘법(法) 거량’이라는 것이 전해 내려온다. 이는 수행자가 각고의 정진 끝에 깨친 바를 큰 스님이나 은사 스님과 화두로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수행자로서는 깨달음의 정도·수준을 확인받는, 일종의 시험대인 셈이다. 많은 스님이 전국의 선방에 들어가 있는 지금, 법 거량의 무대는 선가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되고 있다. ‘불교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중생이 내놓은 화두에 불교계 전체가 답을 내놓을 차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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