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천안문>다시 읽기
  • 임상범 (한신대 강사·중국현대사) ()
  • 승인 1999.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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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에서 중국 혁명은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나 전기적인 기록이 아닌, 생동감 있는 삶의 기록으로 그려져 있다.
새삼스럽게 또다시 <천안문>인가? 이 책은 이미 80년대 중반 동일한 역자에 의해 소개되었다. 당시 중국 혁명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회 분위기에서 역자는 왜곡된 중국 이미지를 교정하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이 책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중국인의 혁명 여정이 한국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감명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역사 책과는 상당히 다른 서술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 한국 사회에서 중국 혁명은 그때 그 의미를 거의 상실했다. 중국 혁명은, 기껏해야 마오쩌둥과 덩샤오핑만을 남기고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장궈룽(장국영)과 궁리(공리)가 더욱 친근하고,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장쩌민만을 알고 있다. 더구나 최근 서양사를 중심으로 해서 사회사·생활사·신문화사와 같은 새로운 연구 방법들이 역사 연구자와 독자에게 소개되면서 예전에 <천안문>이 주었던 강렬한 인상은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단장한 <천안문>은 다시 자신의 생명력을 호소하고 있다. <천안문>을 재생시킬 가치가 있는가? 만약 있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과거, 자신이 사회과학에 속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역사학은 누가 어떻게 승리했는가에 대한 인과 관계 분석에 몰두했다. 그런데 그 결과 역사 책은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사라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차가운 종이뭉치로 변해 버렸다. 그렇지만 <천안문>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묘사는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이나 전기적인 기록이 아닌, 생동감 있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아직까지 이렇게 휴머니티가 묻어 있는 역사 책은 흔치 않다.

이 책의 주인공으로는 캉유웨이·량치차오 같은 저명한 정치가와 학자도 있고, 루쉰·딩링 같은 인기 작가도 있으며, 취추바이·웨이징성과 같은 당대의 반항아도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인생 역정은 시대의 성격을 규정한다. 저마다 독특한 삶의 유형과 개성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희망과 좌절을 탁월한 감각으로 표현한 사람들이다.

더 근본적으로 이들은 동아시아가 근대 국민 국가로 전환하려고 모색하던 시대에 활약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개개인이 흥미롭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는가이다. 과거와 현재 대부분의 역사 책들은 자신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면서, 역사가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암호로 채워져 있다. <천안문>은 이러한 점에서 다루는 대상뿐만 아니라, 책 자체가 매력을 발휘한다.
일본어투 번역문 극복…그림·사진도 새로 삽입

이 책을 쓴 조너선 스펜스는 명성이 널리 알려진 중국사학자이다. 그는 36년 영국에서 태어나 65년 미국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줄곧 예일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교양 중국사 강의는 매우 인기가 있어 매번 수백 명이 넘는 수강자와 청강생 들로 넘쳐난다고 한다.

그의 수려한 문장은 역사학의 좁은 범위를 넘어, 문학적 향취까지 느끼게 한다. 대개 이러한 글들이 번역자에게는 더욱 힘든 과제를 부여한다. 만약 잘못 번역하면, 늘어지는 만연체가 되거나 모호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번역자는 이번에 상당히 정성을 들여 종래의 번역문을 대폭 수정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약간씩 보이던 일본어 투의 문장도 제법 극복했다. 또 하나의 미덕은 과거에 모두 삭제했던 그림과 사진을 되살린 것이다. 비디오 시대인 현재, 우리 주변의 이야기가 아닌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복원은 시의적절했다.

현재 어려운 출판계 상황에서 절판된 책을 되살린다는 모험은 그 책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실행하기 힘든 결단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럴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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