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전투적 글쓰기의 풍경과 상처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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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등 논객들, 가차없는 ‘말싸움’ 가열…논점 명확하나 감정적 언어 돌출해 ‘충돌’ 빚기도
바야흐로 활자 전쟁이다. 적어도 요즘 벌어지는 논쟁의 지형 안에서 펜은 칼만큼 위력적이다. 눈에 띄는 논제로는, 운동권에 비판과 반론(진중권·최진섭), <조선일보>와 작가의 ‘문언 유착’에 대한 진단(김정란), 강준만의 지식인 비판에 대한 반비판(진중권) 등이다. 위 글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주제와 어투다. 이들은 ‘공격적인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논제에 대한 입장이 팽팽히 맞설 뿐 아니라, 어조 또한 강경하기 그지없다.

우선 ‘말’을 중심에 놓고 볼 때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논자는 진중권씨이다. 좌파 논객이라고 자처하는 진씨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매우 집요하게 물고늘어진다. 진씨의 특징은, 상대의 창을 이용해 상대를 찌른다는 데 있다. 상대방이 펼치는 논리의 자가당착을 명쾌하게 집어내거나, 그 주장이 낳은 현실적인 결과를 비판하는 ‘인용과 반박의 글쓰기’는 진씨의 특허품이다. 그러나 그의 말투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 진씨의 글에 대한 반응은 ‘속이 시원하다’와 ‘대꾸하기조차 싫다’로 극명하게 갈린다.

문제는 그의 글이,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쉽게 통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는다는 점이다. 진씨는 자신의 독설(혹은 비아냥)에 대해 해명한 적이 있다. ‘내 글은 비판이 아니다. 그들은 학적인 비판의 대상이 될 주제가 못된다’(<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설혹 제기하는 방식에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해도 당초 제기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진중권씨가 운동권에 대해 제기한 문제를 보자. 진씨는 NL의 언어를 ‘지배의 언어’로, 이진경씨를 대표 주자로 한 PD 진영의 그것을 ‘탈주의 언어’라고 이름 붙인 뒤 양자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비교했다(<당대비평> 봄). 그는 ‘NL의 언어’에 대해 이데올로기가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주입됨으로써 주체들을 행동 대원으로 전락시켰다고 공격한다. 또 ‘탈주의 언어’에도 진보적 지식과 이념의 생산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의 비아냥은 ‘NL의 언어는 키치로서 19세기 역사화를 베낀 이발소 그림이며, 탈주의 언어는 프랑스제 비구상 회화다’ 혹은 ‘지배의 언어가 무식하게 명확한 반면 탈주의 언어는 한없이 애매하다’라는 식으로 변주된다. 그는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구체적인 실천과 맞물리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언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진단한다.

반론은 NL진영에서 터져나왔다. 전대협 간부였던 최진섭씨가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고, 진씨는 재반론을 실었다. 최씨는 ‘파시스트와 싸우다 파시스트를 닮아 가는가’라는 글에서 진씨의 태도를 문제삼았다(<말> 4월). 진씨의 비판에 경청할 만한 지적도 많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가 ‘자결·자폭·청산을 강요하는 죽임의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최진섭씨의 입장은 ‘인간 없는 텍스트는 몸 없는 말’이라는 데 잘 드러난다. ‘진씨는 텍스트 안팎의 인간을, 그리고 인간의 실천과 신념, 눈물과 양심을 읽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의 비판에서) 전대협·한총련의 인권과 명예는 없다. 단 한 구절의 애정도 찾아볼 수 없다’ 는 것이다. 이어 최씨는, 진중권씨가 ‘논리적인 선동가’이며 그의 글에서 폭력의 쾌감이 느껴진다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진씨는 재반론에서, 자신의 텍스트 분석은 지배의 언어가 되뇌는 ‘신념·눈물과 양심’ 속에서 감추어진 ‘광신, 냉혈과 비양심’을 읽어내는 것이며 ‘리바이어던으로 돌변한 조직(한총련)의 권력자에게는 애정이 없다’고 맞받아친다(<말> 5월).

문학 평론가 김정란씨의 <조선일보> 문화면에 대한 진단글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조선일보를 아십니까>)’도 만만치 않은 파장을 예고한다. 진씨의 경우처럼 반론이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비판의 대상이 구체적일 뿐 아니라 강도가 워낙 세기 때문이다.

김씨의 관점은 본인이 밝힌 대로 강준만씨가 펼쳐 온 ‘조선일보 제몫 찾아 주기’와 맥을 같이한다. 강준만씨는 <조선일보> 문화면이 정치면의 극우성을 희석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 뒤, 문단의 진보 진영이라 할 수 있는 ‘창비 사단’(백낙청씨를 필두로 한 창작과비평사의 평론가와 작가)을 지목해, 창비가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다면 <조선일보>의 영향력도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결단을 촉구한 바 있다. 김정란씨는 창비가 <조선일보>에 정치적인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아래에는 남근적인 권력 지향이 자리잡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김씨는 문언 유착의 책임을 작가 개인에게 물었다. 90년대 <조선일보>의 특징은 문화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인데, 의식 없는 작가들이 그 노선을 열심히 거들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진보적인 취향을 가진 문인이 군사 문화를 옹호하는 극우파 신문에 버젓이 얼굴을 내민다는 것은 도무지 ‘쪽 팔려서’ 못할 일이다.”

김정란씨는 ‘<조선일보>가 스타로 내세운 작가들은 공통점이 있다. 칼칼하고 똑똑한 작가는 눈에 띄지 않는다. 한결같이 들척지근하고 느끼하고 멍청하다. 90년대 들어 한국 문학은 부드럽고 멍청한 애첩의 지위로 몰려났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김씨는 이런 일반론에 만족하지 않고 특정 작가를 지목했다. 문언 유착의 관행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주겠다는 의도에서다. 김씨는 그 작가에 대해 “스스로 언론의 시녀가 됨으로써 그 반대급부를 챙기는 계략을 터득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김씨는 그 사례로 ‘여성에 대한 소설을 써서 그것으로 유명해졌으면서도 자기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완강하게 부정하는 태도’를 꼽았다. 그 바탕에는 여성들의 미움을 삼으로써 남성 권력자들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진중권씨의 강준만 비판은 다소 이채롭다. 한껏 예의를 갖추었으되 비판의 강도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진씨는 ‘미쳐버린 대한민국에서 용감하게 상식을 옹호하고 있는’ 강씨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면서 ‘지식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최선의 방법은, 당사자도 믿지 않을 쓰잘 데 없는 주례사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그의 글에 대한 성실하고 진지한 비판에 있다’고 전제한 뒤 팔을 걷어붙였다.

진씨가 ‘한 전투적 자유주의자의 지식인 혐오증?’(<자유라는 화두>)에서 문제로 삼은 것은 강준만씨의 지식인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준만씨가 자신의 글쓰기 권력을 수립하는 데, 파시스트적인 지식인 비판을 원용하는 ‘반칙’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자신의 지식인 비판을 조갑제나 김용옥의 그것과 구별하는 데 실패했다.’

파시스트는 흔히 ‘썩어빠진 지식인’ 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대중’을 대비하면서 반지식인 운동을 펼치는데, 그 아래에는 정치 권력(마크로 권력)에 대한 의지나 글쓰기 권력(미크로 권력)에 대한 욕망이 깔려 있다는 것이 진씨의 관점이다. 진씨는 전자의 예로 정치 권력이 벌이는 반지식인 운동, 후자로는 도올 김용옥의 지식인 비판을 꼽았다. 그들과 강준만의 지식인관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론은 단호하지만 강씨에 대한 비판에는 단서가 많이 붙어 있다. ‘조갑제의 지식인 비판이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우민화 정책과 관련이 있다면 강준만은 그런 흑심이 없다. 하지만 왜 그는 특정을 하지 않고 모든 지식인을 싸잡아 비판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진씨는, 강씨의 지식인 비판이 현실적으로 좌파 지식인을 겨냥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그의 글쓰기는 김대중의 마크로 권력(정치 권력)에 복무한다. 그가 진보적 지식인을 타깃으로 삼는 건 이들이 적어도 지성계에서는 정치 세력화 정도에 걸맞지 않는 지식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가 (조갑제와 마찬가지로) 지식인의 ‘위선적 도덕주의’와 ‘관념적 이상주의’를 비판하는 현실적인 의도는, 김대중을 찍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 세력화하는 것은 관념적 이상주의라고 말하고 싶어서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강씨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이미 밝혔으므로 나올 수 있는 비판이다. 하지만 진씨는 강씨의 글쓰기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즉 강준만의 글쓰기는 강단/정가의 구별을 없애, 자신의 당파적인 정치 참여가 일종의 학적 공정성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차원을 혼동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이 혼동을 원리의 차원으로까지 정당화한다는 데에 있다고 진씨는 일침을 놓았다.

크게 세 갈래로 진행된 위의 논쟁은 최근 들어 늘어난 ‘공격적인 글쓰기’ 의 성과와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가차없는 설전을 통해 쟁점이 명확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감정적인 언어들이 거칠게 돌출함으로써 불필요한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진섭씨의 반론과 이에 대한 진중권씨의 재반론이다. 이를테면 진중권씨가 ‘빌어먹을 정도로 가난한 NL의 언어. 그것은 전체주의 군중의 정신적 황폐함의 반영이다’라고 말하면 상대는‘진중권의 언어는 부유하다. 그런데 그의 민족애는 가난하다. 빌어먹을 정도로 가난하다’라고 맞받아치게 된다. 인신 공격성 발언도 난무한다. ‘진중권의 심리에는 열등감의 표현 양태인 냉소주의, 극단적인 부정, 무차별적 공격성, 타인 학대의 증세가 농후하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일찍이 ‘논쟁에서 이기는 요령’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했던 쇼펜하우어는 ‘모든 논쟁에서, 일단은 서로 동의하는 점이 있어야 한다. 제시되는 첫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과는 논쟁을 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더 긴요한 조건이 있다. 서로에 대한 신뢰다. 기본적인 신뢰가 무너지면 서로 말을 건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말의 설득력이란 논리와 열정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그 열정이 거친 전투 의지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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