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별종 감독’ 장 진의 <간첩 리철진>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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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진 감독 <간첩 리철진>, 독특한 발상·감성 돋보여
이야기의 매끈함보다 작가의 심성이 먼저 다가오는 영화라고 말하면, 칭찬일까 욕일까. 많은 작가가 ‘영화는 작품인 동시에 상품’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은 말보다는 시장의 요구를 쫓는 요즘, <간첩 리철진>(연출 장 진)은 주인공의 캐릭터만큼이나 눈에 띄는 별종이다.

하지만 장 진 감독(29)의 영화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을 떠올린다면, 더 거슬러 단편 <천호동 구사거리>(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의 질펀한 사투리와 연극 <허탕> <택시 드리벌>의 해학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별종이라고 느끼는 이런 감성이 낯설지 않다. 그는 자신의 브랜드 이미지를 착실히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장 진 감독이 처음 영화사에서 넘겨받은 시놉시스는 ‘택시 강도를 당한 남파 간첩의 1주일 동안의 오디세이’가 전부였다. 당시 <신장 개업>(연출 김성홍) 초기 작업을 하고 있던 그는 시놉시스를 받아들자마자 두 말 않고 <간첩 리철진>을 택했다.

발상만 빌렸을 뿐 그는 작품을 새로 썼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첩 리철진은 어리숙하면서도 투철하다. 겉보기에 매끈하나 사리 분별은 흐리멍텅한 자본주의적 인간형을 뒤집은 것이다. 장 진은 “리철진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반사경이다”라고 말한다. 비록 남한에 침투하자마자 택시 강도를 당해 총·지도·공작금을 모두 털릴 정도로 어눌한 그이지만, 한편으로는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하는’ 서울 사람들보다 훨씬 고결하게 그려진다. 대남 특수공작원인 그의 임무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 개발 한 슈퍼 돼지의 유전자를 훔치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지만, 바로 그때 한국 정부가 북한에 슈퍼 돼지 유전자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장 진의 이채로움은, 그가 문학에서 연극으로, 그리고 가장 상업적인 고려가 필요한 영화로 영역을 점차 넓혀 왔다는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영화 <기막힌 사내들>은, 남다른 재미를 주었지만 호객에는 실패했다. 영화로서는 어설프지만, 감독으로서는 ‘싹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흥행 성적이 시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작품을 함께하자는 제안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기술이 쌓였고,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지만 장진 감독의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전작에 비해 훨씬 온건하지만 개연성보다는 과장과 희화를 즐기는 연극적인 발상법도 여전하다. 경찰과 좀도둑이 경찰서에서 대거리하는 장면은 ‘장 진 標’ 코미디의 절정판이라 할 만하다. 그의 개성은, 지금 충무로가 얼마나 장사에 골몰하고 있는가를 상기하면 하나의 전술로 평가될 만하다. 남들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장사에 대한 강박을 끊어내기가 어려울 판에 이런 뱃심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막힌 사내들>을 극장에 걸어놓고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내 감성이 어리다고 한지만, 굳이 바꾸려 애쓰지 않겠다. 경험이 쌓이면 자연스레 바뀔 것 아닌가.”큰 얼개와는 상관이 없지만, 쿡쿡 웃음을 자아내는 일화들의 구실도 작지 않다. 이런 식의 뒤죽박죽 유머를 구사한 예로는 송능한 감독의 <넘버 3>을 꼽을 수 있다. <넘버 3>이 날렵한 풍자극이었다면, <간첩 리철진>은 어리숙한 우화다. <넘버 3>이 “배, 배신이야”라는 대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막무가내 정신’을 풍자(혹은 자조)했다면 장 진 감독은 단순 무식한 네 ‘양아치’를 통해 비슷한 효과를 거둔다. 그들은 줄거리로 수렴되지 않고도, 자신의 몫을 다한다.

장 진은 주변에서 웃음의 계기를 찾지만, 단순한 ‘채집’이 아니다. 그의 요리법은 아이러니와 풍자와 자조다. 그리고 특유의 ‘세상에 나쁜 놈 없다’는 휴머니즘이 작품을 따뜻하게 데운다. 이를테면 간첩이 은행털이범을 잡아 용감한 시민이 되고, 간첩을 턴 양아치가 오히려 간첩으로 몰린다. 양아치는 조직 폭력배가 자신을 무시하자 분에 못이겨 총을 쏘고도 자신을 위해 총을 쏜 것은 아니라며 대의명분을 끌어댄다.

리철진이 슈퍼 돼지 유전자를 훔치는 긴박한 순간에도 장 진 감독은 스릴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엉뚱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풀어 간다. 바로 한 사람의 간절한 마음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영화는 유전자를 훔쳐 달아나는 리철진이 쫓기는 모습과, 멀리 떨어진 전시회장에서 그의 안부를 걱정하는 여인 화이의 모습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손금이 나쁜 리철진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화이는 조각상의 생명선을 길게 잇는다. 화이가 선을 잇자마자 거짓말처럼 리철진은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비켜난다. 개연성에 아랑곳하지 않는 장 진標 낭만주의다.

배우들의 이미지는 어수룩하고 호감을 주는 배역과 잘 맞아떨어진다. 리철진 역을 맡은 유오성은 <맨>(연출 여균동)과 <그들만의 사랑>(연출 임종재)에서 부진했던 것을 말끔히 씻어냈고, 텔레비전 핸드폰 광고에서‘걸리는 게 있지’라며 (커리어 우먼이 아니라) 정감 있는 도시 처녀의 이미지를 선보인 박진희는 <여고 괴담>에 이어 안타를 날렸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9억여 원. 요즘 한국 영화의 평균 제작비에 한참 못 미친다.

첫 작품에 비해 나아지기는 했지만, 리듬에서 어설픈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매력은 왜 충무로가‘돈 놓고 돈 먹기’식의 덩지 큰 영화에만 골몰해서는 안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돈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픈 말이 있고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작가에게 길이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화 평론가 이성욱씨는‘한국 영화 여기까지 왔다, 충무로여 반성하라’며 관객을 선동한다. 상찬의 근거가 매끈한 완성도는 아니다.‘내 식대로 말 걸기.’ 얼마나 많은 관객이 그의 방식에 공감할지 알 수 없지만, 전작에 비해 느낌이 좋다는 것이 중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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