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모던 포크 불씨 되살린 김광석
  • 강 헌(음악 평론가) ()
  • 승인 1995.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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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존재는 70년대에 대학가를 뒤흔든 모던 포크의 통기타 정신이 90년대에 이르러서도 역사적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여전히 의미 있음을 증명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중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는 무시하지 못할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었다. 95년 봄의 신작 <다시 부르기 2>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놀라는 것은, 모던 포크의 계승자 혹은 수호자로서의 자각을 아로새긴 94년의 네 번째 정규 앨범에 이어 자신과 자기 음악의 계보학적 원점을 `‘다시 부르기’, 즉 리메이크를 통해 70년대의 김민기·한대수·김의철·이정선·백창우 같은 이 장르의 봉우리들 뒤에 자신을 놓는 전략적 기민함이다.

이른바 문민 정부가 들어서고 민족·민주 진영 예술가들의 본산인 민예총이 사단법인으로 환골탈태하는 94년에 이르러, 그리고 노래운동의 음악가들이 관이 주도하는 고급 예술의 아성으로 지탄 받던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스스럼없이 서고 있는 이즈음에, 저 80년대를 소리 높이 외쳤던 저항 음악가들은 꽃다지와 노래공장이 나란히 ‘`비합법’ 시대의 종언을 고하면서 합법적인 영역으로 자신의 존재를 이전하는 작업을 거의 끝냈다.

이는 90년대 초반에 걸쳐 숨돌릴 틈도 없이 진행된 일련의 역사적 변전의 원심력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진보 진영의 양적 위축이 노래운동의 토대를 약화시켰고, 또 한편으로 진행된 일반 민주주의적 개혁 분위기가 그동안 이들 예술가의 목을 졸라왔던 검열의 수위를 대폭적으로 완화시킴으로써 `‘굳이’ 비합법적인 영역을 고수할 근거 가운데 하나를 상실하게 된 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좀더 넓은 대중 접촉 면적을 지향하는 예술가 고유의 본능이 개입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노래운동 출신으로 대중음악계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성공적으로 진입을 감행한 이는 아무래도 `‘<녹두꽃>의 가수’ 김광석일 것이다. `‘노찾사’에서 `그룹 ‘동물원’을 거쳐 솔로로 돌아선 그는 2집 앨범의 <사랑했지만>이 히트해 일약 라이브 무대의 총아로 올라섰으며, <나의 노래>를 앞세운 세 번째 앨범과 리바이벌 앨범 <다시 부르기 1>의 연이은 상업적 성공은 그를 거물로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숙한 통찰력 필요

그의 성공은 뒤이어 솔로로 전향한 안치환과 권진원의 와신상담, ‘노래를찾는사람들’의 상대적 퇴조와 `‘천지인’, `‘꽃다지’ 및 `‘노래공장’의 미약한 대중적 영향력에 견준다면 특출한 예로 기록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결코 우연에 기댄 것은 아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은 싱어송라이터 역량을 구비하지는 못했지만, 아마추어리즘이 주도하던 80년대 노래운동 진영에서 독보적인 보컬의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통기타와 하모니카라는 지성적 이미지를 초기에 확보함으로써 댄스뮤직과 테크노사운드로 도배질 당한 90년대 대중 음악의 질서에 대항하는 참호를 획득했던 것이다.

<녹두꽃>의 가수가 노찾사를 탈퇴하면서 곧바로 동물원의 `<거리에서>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의 ‘가수’로 전환할 수 있었던 열쇠는 그의 탁월한 보컬 해석 능력이다. 그리고 그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된 소극장 라이브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공연장을 찾는 적극적인 수용자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은 김창기의 곡인 <거리에서>나 한동준이 작곡해준 <사랑했지만> 같은 우아한 발라드였고, 따라서 자유분방하며 도전적인 메시지를 구사하는 싱어송라이터의 역사적인 계보를 잇는 데엔 아무래도 미흡한 것이었다. 명백히 그의 솔로 앨범 3장은 기타를 메고 `‘길’을 찾아나선 자의 것이 아니라 소극장의 밀교적인 공간에서 열렬한 지지자들의 지지에 머무른 자의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사랑타령에 함몰한 가수로 몰아붙이는 것은 커다란 오류가 될 것이다. <기다려줘>와 <너에게>를 타이틀로 내세운, 음반산업의 이윤 동기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솔로 데뷔 앨범과 <사랑했지만>을 내세운 2집 앨범에서조차도 모던 포크를 향한 그의 더듬이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성공의 결정타가 된 92년의 3집 앨범과 93년의 <다시 부르기1>에 이르러서는 바로 그 통기타 정신이 전면으로 떠오른다.

비록 70년대 대학가 노래운동의 산물을 리메이크한 것이긴 하지만, 한동헌 작곡 <나의 노래>와 80년대에 만들어진 김현성 곡 <이등병의 편지>는 90년대에도 모던 포크가 얼마든지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브 발라드와 모던 포크 사이의 외줄타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요소야말로 그의 존립 근거였던 셈이다.

우디 거스리·피터 시거에서 발흥해서 봅 딜런에 이르러 만개한 미국 모던 포크의 계보는 바로 60년대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의 강인한 부산물이었고, 이에 영향 받은 70년대 초반 한국의 이른바 통기타 혁명 역시 그 시대 문화와 정치에 대한 인텔리겐치아 그룹의 대안적인 몸부림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민기라는 처절한 화두를 경험했으며, 끊임없이 자신을 운동시켜 나간 정태춘이라는 가객을 영접했고, 작은 등불을 꾸준히 점멸하고 있는 조동진과 이정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혁혁한 이름에 비하자면 김광석은 아직 점이지대의 철조망을 힘겹게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음악 장악력은 더 많은 피와 땀을 그에게 요구하고 있으며, 특히 이 장르에서 중요한 가사 문제에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더욱 성숙한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가 사랑에 관한 노래를 불러서 안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겠지만, 대중 음악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마저도 이 장르의 정신에 의거한 발상 전환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94년의 네 번째 앨범은 그러한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해 주었다. 즉, 키보드를 이용한 일렉트릭한 정조를 말끔히 걷어내고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피아노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플루겔 혼과 트럼펫을 정감 있게 사용하여 투명한 텍스트를 획득하는 데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피아노의 선율과 묘한 조화를 이루어가는 <회구>의 독특한 정적감,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의 궁합 위에 담담하게 서술된 <너무 아픈 사랑은…>의 매력적인 보컬, 그리고 새로울 것이 없는 악절 구성이지만 그 어떤 노래보다 정감 있게 울리는 보컬과 관악기와 기타의 어울림은 가슴 깊이 저며든다.

반짝했다 사라지는 댄스뮤직류와 달리 이 장르의 정신은 단번에 채워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김광석의 근작은 그래서 희망적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별자리가 어느 것인지 자각했음이 명백하게 보이기 대문이다. 김민기 이후 이정선·조동진·정태춘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이 장르의 계보도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그에 의해 다시 작성될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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