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박재동·김상택의 ‘촌철살인’
  • 정준영 (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1995.08.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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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김상택의 만평, 압축적 ‘비틂’으로 갑갑한 상황 통쾌하게 돌파
시사 만화에서 시사란 구성적 요소를 이룬다. 비록 단편적이지만 당대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 시사 만화의 필수라는 말이다. 따라서 시사 만화에서 가장 관심 깊게 지켜 보아야 할 것은 역사를 보는 눈이다. 당연하게도 시사 만화에서 중요한 것은 시사 만화가 서 있는 입지점, 다시 말해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오랜 독재 속에서 시사 만화는 우리 만화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또 가장 대중적인 부분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언론의 마지막 보루로 사랑을 받아 왔다. 물론 시사 만화가 시사 만화로 된 데에는 어떤 허구보다도 더 흥분을 불러일으켰던 우리 사회의 상황과 만화마저 저항의 일선으로 내몬 권력의 편협성이 작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시민의 광범위한 지평에서 대중의 소박한 불만을 적절하게 수렴할 수 있었던 시사 만화가들의 시각도 무시할 수 없다. 시사 만화의 산 역사인 고바우와 왈순 아지매, 나대로 선생과 야로씨의 시각은 그 자체가 바로 서민 대중의 시각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박재동과 김상택의 시사 만평은 네 컷 만화가 지배하던 우리 시사 만화계에 한 컷 만평의 새 시대를 열어젖히며 변화한 사회 분위기를 전달해 주었다. 80년대 말 이후의 확대된 언론 자유 속에서 네 컷 만화의 서술적 기능은 너무 지루하고 거추장스럽다는 점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지금까지 시사 만화의 시각을 지배하던 소시민이라는 틀이 너무 모호하거나 아니면 갑갑한 틀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소시민의 모호함이 지속되기에는 사회가 지나치게 분화했고, 단순한 틀에만 의지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다는 말이다. 이미 사건이 충분히 알려져 있는 상황에서 박재동과 김상택의 만평은 상이한 방식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참신한 시각과, 갑갑한 상황을 통쾌하게 돌파하는 압축적인 비틂의 미학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게 되었다.

박재동의 방식은 자기 시각을 더욱 좁고 견고하게 정립하는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노동자·농민·학생과 전교조 교사, 억압 받는 여성의 처지에 선다. 따라서 진보 세력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얻어가고, 진보 대 보수라는 구도가 등장하던 시기에 그가 누린 폭발적 인기는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초기 만화에 자주 등장하던 익명적인 권력자의 상은 이 대립이 단순한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 구조적인 것에 가까이 가 있는 것임을 의미했다. 개인이 소재가 될 때에도 그들의 모습은 이 익명적인 권력자의 범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그 반대편에는 순정 만화의 인물만큼이나 이상화한 프로타고니스트들이 있다.

박재동의 방식은 많은 집단을 자기 반대편에 세우는 방식이기도 했다. 박재동의 지지자가 열광적이었던 만큼 적대자들의 질시도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진보가 더 이상 진리를 주장할 기반을 상실해 가자 그의 만화가 지닌 활력 역시 불가피하게 약해져 가기 시작했다.

박재동은 편협, 김상택은 위험

김상택은, 박재동과는 반대로 좁게 규정된 어떤 입장에도 정착하기를 거부하는 방향을 택했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그는 잡스러운 세상사에 비웃음의 눈길을 보낸다. 따라서 확고한 지지자는 없지만, 그가 즐겨 다루는 정치가 총체적인 부정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는 이 정치적 허무주의의 가장 훌륭한 대변자로서 대중 앞에 등장할 수 있었다. 화면을 종횡으로 누비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화되어 가는 그의 만평의 어두운 빗금들은, 한편으로 그가 중점 묘사할 대상인 인물의 얼굴에 강한 조명을 비추는 효과를 지니기도 하지만, 또한 더욱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우리 정치의 현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의 비틀린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화려한 스타의 화장 뒤편에서 구역질나는 피부의 생생한 결을 훔쳐 보았을 때만큼이나 환멸을 느끼게 된다.

박재동과 김상택의 만평이 서로 다른 시기에 누린 인기는 지난 7~8년간 우리 사회의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그들의 인기는 그들의 시각이 지닌 호소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박재동의 틀이 너무 편협한 것이었다면 김상택의 틀은 위험하다. 진리를 주장하는 데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방법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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