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멜로로 관객 사로잡는 대중극들
  • 이영미 (연극 평론가) ()
  • 승인 2004.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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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울린 뒤 감동 안겨 ‘롱런’
연극은 비대중적인 예술처럼 보이지만, 연극판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다종다양한 층위를 가진 대중극들이 존재한다. 연극의 거리 대학로에 함께 기거하기는 하되, 연극인들과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벗기기 연극이나 개그 콘서트류의 개그 공연들이다. 그러나 사랑티켓 혜택도 받고 각종 연극 잡지의 공연 안내를 통해 홍보되는 연극 중에도 대중극이 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몇 년째 막을 내릴 줄 모르는 <라이어>와 <용띠 개띠>, <신(新) 살아보고 결혼하자> 같은 작품일 것이다. 두 편은 번역물이고 다른 하나는 창작극이지만, 모두 쉴 새 없이 관객을 웃도록 만드는 희극이라는 점, 초장기 공연 과정에서 연출자들이 손을 떼고 배우 중의 한 사람이 주도해 제작 방식을 정리해 나간 경우가 많다는 점 등이 공통적이다.

이른바 ‘진지한 연극’을 주로 하는 극단·연극인이 만든 작품 중에도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롱런에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서울 청담동의 극단 유에서 해를 넘겨 공연하는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대학로 작품들 중에는 몇 달 롱런 끝에 올 봄에 막을 내린 <보고 싶었습니다>, 2003년 봄부터 공연해오다 이번 7월 중순에 일단 막을 내린다는 <우동 한 그릇>, 흥행 보증수표인 듯 틈만 있으면 재공연하는 <유리가면> <휴먼 코미디> 같은 작품들이 있다.

지난 봄에는 <줄리에게 박수를>과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등이 롱런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둘 다 아직 재공연 결정을 못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진지한 연극을 하는 연극인들(예컨대 7월에 국립극단에서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는 전 훈이나 삼성문예상 수상 작가 박수진, <슬픔의 노래> 등 수작을 뽑아낸 연출자 겸 배우 김동수 등)의 작품이지만, 평론가들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대신, 연극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일반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6년 전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던 김광보의 <뙤약볕>이나, 박상현·이성열이 호흡을 맞춘 올 상반기 수작 <자객열전>뿐 아니라, 동숭아트센터의 ‘연극열전’ 시리즈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문예회관이나 정미소·동숭홀에 비해 형편없이 작고 초라한 극장에서 공연되는 이런 대중적인 작품들에는 관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물론 그 관객의 상당수는 극장 안에서 껌을 씹거나 물을 마시고 카메라폰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일반’ 관객이다.

도대체 이런 작품은 무슨 매력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크고 화려한 수입 뮤지컬들이 대중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버튼만 누르면 얼마든지 대중적인 영화와 방송극을 볼 수 있는데, 왜 불편한 대학로까지 나와 비좁고 퀴퀴한 소극장을 찾는 것일까?

몇 가지 공통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화를 각색한 <유리가면>이나 마임과 슬랩스틱의 기술 수준으로 한몫하는 <휴먼 코미디>를 제외하면 내용을 주도하는 것이 남녀간 혹은 가족간 사랑이다. 확실한 멜로 드라마이다. 게다가 확실하게 울리고 종종 확실하게 웃긴다. 대개 초반에는 객석을 포복절도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중간에 훌쩍거리는 소리를 거쳐 뜨거운 커튼콜 박수소리로 끝난다.

관객의 눈물샘을 건드리려니 상황 설정이 극단적이다. 중소 도시 구멍가게를 지키는 눈먼 처녀와 조폭에게 쫓기는 주먹패 청년의 사랑(<보고 싶었습니다>), 해마다 연말에 찾아와 미안한 태도로 우동 한 그릇을 시켜 따뜻하게 먹고 가는 가난한 세 모자와 이들을 해마다 기다리며 테이블을 비워놓는 우동집 주인의 이야기(<우동 한 그릇>), 헤어스프레이와 파리약을 구분하지 못하고 돈 계산도 잘 못하는 정신장애인 부모와 똘똘하지만 소아암을 앓는 어린 아들이 이끌어가는 가족 이야기(<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 등이다.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 ‘짜릿’

물론 이런 연극들은 멜로와 눈물의 감동, 그 밑바닥을 헤집으며 인간 세상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래서 구질구질하기는 비슷해 보이지만, 눈물을 거부하며 오히려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연출가 박근형의 연극과는 다르다. 그래서 대중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대중극은 초라하고 퀴퀴한 소극장이라는 조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일 수도 있다. 출구 없이 얽힌 가난과 장애들, 구질구질한 인물들이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는 서민적 공감은, 오히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소극장 대중극만의 특화된 영역으로 남을 수도 있다.

여기에 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는 필수 조건이다(<눈 먼 아비에게…>에서 염혜란의 경주 사투리 연기는 기가 막히다). 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 재현되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아주 색다르고 강렬하다. 이것이야말로 연극의 맛이라는 사실을 일반 관객들로 하여금 만끽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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