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베일 벗는 북한 과학의 '아버지들'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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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날론 발명자 이승기 등 대표 학자들 소개한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 곧 번역·출간


화학 섬유 비날론 발명자 이승기, 고급 견사의 원료인 피마잠을 개량한 계응상,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학문인 '양자 역학' 이론을 소개해 주목되었던 물리학자 도상록, 한국 최초의 해부학자 최명학….

사진설명 이승기 : 화학자. 합성섬유 비날론을 발명했으며, 광복 후 월북해 화학공업 중심지인 함흥을 중심으로 각종 화학 제품 개발에 앞장섰다. 북한에서 '공화국 화학 공업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북한을 대표하는, 아니 민족 화해 시대에 한민족을 대표할 수도 있는 북한의 현대 과학자들이 최근 남북한 사이에 조성되고 있는 화해·협력의 흐름을 타고 남한에 본격 소개된다. 서울대 BK21 북한교육연구팀(팀장 김기석 교수·교육학)이, 현재까지 나온 자료로는 가장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북한 학계의 주요 인물을 소개한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원제 〈現代 朝鮮の 科學者たち〉을 입수해 번역·출간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1997년 일본 채류사에서 일본어로 나온 이 책은 일본 조총련계 최고 교육기관인 조선대에서 핵물리학과 과학교육사를 담당하고 있는 임정혁 교수가, 분단 이후 최근까지 북한 학계의 흐름을 인물사 중심으로 서술했다. 1999년 학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했다가 지은이로부터 직접 이 책을 소개받은 김기석 교수는 이 책이 '제3의 시각으로 북한 과학을 서술한 비교적 객관성 있는 자료'라고 판단해 국내에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책의 최대 미덕은 단지 북한 체제에 합류했거나 협력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학문적 업적이 평가 절하되어 왔거나, 아예 학문적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던 북한 1급 과학자들의 생애와 행적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승기(1905∼1996)이다. 일찍이 1939년 신종 화학 섬유 '비날론'(당시 '합성 1호') 합성에 성공해 세계 응용화학계에 이름을 떨친 이승기는, 1946년 북한에 김일성대학이 문을 열면서 북한측 초청을 받고 월북했다. 이후 이승기는 김일성으로부터 절대적인 후원을 받으며, 비날론 대량 생산은 물론, 비날론 개량과 합성 고무·염화 비닐 등 화학 제품 개발을 통해 1960∼1970년대 북한 화학공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자연·사회·인문 과학자 폭넓게 소개


사진설명 김석형 : 역사학자. 1960년대 초반 일본이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뒤집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유명해졌다. <조선전사> 편찬을 주도하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6·25 직후 세계평화평의회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미군이 콜레라나 티푸스 등 세균을 전쟁에 이용한 사실을 폭로해 국제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수의학자 김종희의 행적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김종희는 일본 홋카이도 제국대학 수의축산과 출신으로 광복 전 한때 부산가축위생연구소에서 활동했다. 1946년, 당시 북한에서 '우역(牛疫)'이라는 전염병이 돌자, 김종희는 학자적 양심을 앞세워 우역 예방과 치료에 협력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1946년 10월 월북한 뒤 줄곧 김일성대학 농학부 교수로 활동하면서 북한 수의학을 이끌었다.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에 언급된 과학자들은, 이승기의 경우처럼 대부분 자발적으로 북한 체제를 택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북한에서 이들의 활동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북한 내부의 정치적인 풍향에 의해 때로는 일부 과학자들이 반동으로 낙인 찍히거나, '미제 스파이'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양잠학의 대가이자 고전 유전학의 권위자였던 계응상은 한때 자신의 유전학이 '반동 학설'로 몰려 숙청 위기까지 갔었다.



〈현대 북한의 과학자들〉이 지닌 또 다른 미덕은, 이 책이 정통 과학·기술 영역의 인물은 물론, 역사학·국어학·철학 등 북한 인문·사회 과학 분야를 이끌어온 핵심 인물들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사회경제사〉로 이름 높은 경제학자 백남운, 고대사 분야에서 일제 식민사학과 치열하게 이론 투쟁을 벌였던 김석형,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조선 철학사 정립을 시도한 정진석(광복 전 보성전문 교수), 지난해 이산가족 상봉 때 남한을 방문했던 국어학의 대가 유 열, 남한보다 한 발짝 앞서 〈조선왕조실록〉을 '북한 현대어'로 번역한 홍기문 등의 학문적 성과와 생애를 조명했다.

이 책에는 이밖에도 북한 과학자들이 자신의 가족사를 회고하거나, 학문적 생애를 돌아보는 내용의 수기도 여러 편 실려 있다. 이 가운데에는 북한 조류학의 권위자인 원홍구(1970년 작고)가 남한에서 역시 조류학의 권위자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 원병오 교수(경희대 명예교수)의 논문을 제3국 학자로부터 입수해 읽고 안타까워하는 글도 있다.

〈현대 조선의 과학자들〉에 소개된 인물들은 '현대 북한의 과학자들'이다. 대부분 광복 직후 북한 체제를 선택해 스스로 북녘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북한의 학문을 건설하기 위해 땀흘린 '1세대 북한 학자'들이다. 하지만 현대사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면 위와 같은 의미도 달라진다. 이들은 북한 체제에서 저마다 학문의 꽃을 피웠지만, 그 학문의 씨앗은 남북이 갈리기 전 '식민지 조선'에서 발아한 것이다. 또한 남북 화해 시대를 배경으로 놓고 볼 때도 이들이 일구어낸 업적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들이 북한에서 일군 학문적 업적 역시 남북한 구별 없이 온전하게 평가받아야 할 '한민족 공동의 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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