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 전설의 진실 밝힌다
  • 김은남·고재열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5.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행과 주벽에 가려 평가 왜곡…“치열한 예술혼·저항 정신 새롭게 봐야”


"장승업이 뭐 얼마나 대단한가? 기껏해야 중국의 아류 아닌가?”
장승업의 삶과 예술을 다룬 영화 <취화선>이 곧 개봉된다는 소식을 듣고 미술계의 한 유력 인사가 내뱉은 말이다.


오원 장승업(1843∼1897년). 우리보다 불과 한 세기 전을 살다간 그는 안 견·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화가’라는 화려한 수사를 달고 다니는 화가답지 않게 작품으로써 본격적으로 평가된 일이 거의 없었다. 그의 기행적 삶, 곧 술과 여자 없이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를 구속하는 것이면 국왕이건 마누라건 박차고 나오고, 종국에는 아무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는 몇몇 일화가 흥밋거리로 세간에 널리 회자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미술계의 평가와 연관이 있다. 2000년 말 국내 최초로 오원 장승업을 본격 재조명하는 전시회(<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화가-오원 장승업 특별전>) 및 학술대회를 개최했던 서울대 박물관장 이종상 교수는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애를 먹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으레 장승업을 ‘중국적 소재에 함몰된 작가’ ‘시대 정신이 결여된 작가’로 폄하하곤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듯하다. <취화선>을 만든 임권택 감독은 이번 영화가 영화적으로는 물론 학문적·미술사적으로도 장승업을 복권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시사저널> 제654호 인터뷰 기사 참조). 이번 영화에서 오원 생존 당시의 화단을 재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몇몇 문화 예술인 또한 장승업의 명예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94쪽 상자 기사 참조).





“그림 안되는 것들이 공자·맹자를 판다”



이들은 무엇보다 장승업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영화 <취화선>의 시나리오를 맡은 도올 김용옥은 장승업을 ‘역사에 등장한 최초의 프로 화가’라고 평가했다(<도올고신> 제41신). 도올이 주목한 것은, 고아에 천한 거렁뱅이 출신으로 아무런 신분적 배경이 없는 그가 일국의 최고 화성(畵聖) 위치에까지 오른 점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장승업이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었다. 실력만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조선 사회에서 명성을 얻은 최초의 화가가 바로 장승업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신분제가 동요하던 19세기 말의 혼란상도 한몫을 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대의 지체 높은 양반들에게 환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장승업이 활동하던 때는 남종화 계열의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영·정조 문예 부흥기에 김홍도와 정 선이 앞장서 이끌었던 활달하고도 진취적인 화풍은 추사 김정희를 거치며 형식화한 문인화풍으로 굳어져 갔다. 이를 떠받드는 지식인들에게 장승업의 그림은 이른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느껴지지 않는 천한 그림일 따름이었다. 이에 대해 영화 <취화선>은 “꼭 그림 안되는 것들이 공맹(孔孟)을 팔아요”라고 비웃는 장승업의 발언을 통해, 형식과 관념을 숭상하던 당대의 위선적인 지식인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장승업은 이들 양반에게 그림을 팔아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오원에게 나타나는 중국 화풍의 비밀은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종상 교수는 주장한다. 서세동점 시기를 맞아 어느 세력에 붙을지 부나비처럼 눈치를 살피면서도 정신적 뿌리는 여전히 모화(慕華·중국 문물과 사상을 흠모함)에 두고 있던 지배 계층이야말로 장승업의 그림 세계를 제약한 근본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무시한 채 힘 없는 작가에게 책임을 전가함은 부당하다는 것이 이교수의 지적이다.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의 그림을 실시간으로 재현한 김선두 교수(중앙대·동양화)는 나아가 중국 화풍을 받아들이되 이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 발전시킨 데 장승업의 위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장승업은 전통 화법과 외래 화법을 두루 받아들이되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경지를 구축했다.



한 예로 장승업 중기 작품 중 <방황학산초추강도>가 있다. 이 그림은 방(倣)이라는 글자가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중국 화가 왕몽(그의 호가 황학산초이다)이 그린 가을 강변의 풍경을 본뜬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하되 장승업 그림 속의 산들은 전체적으로 마치 움찔움찔 춤을 추는 듯하고, 바위들에도 무언가 내적인 생명력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흔히 ‘기운이 생동한다’ ‘신운(神韻)이 감돈다’고 표현되는 장승업 그림의 이같은 자유롭고 활달한 기운은 꽃·풀·나무를 배경으로 새나 동물 따위를 그린 화조영모화에서 더욱 독창적으로 뻗어나갔다.





장승업을 옹호하는 이들은 그에게 치열한 시대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기존 평가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후기작으로 추정되는 작품 중 <노안도(蘆雁圖) 12첩 병풍>이 있다. 둥근 보름달이 막 떠오르고 있는 가을철 갈대밭에 기러기 60여 마리가 떼로 날아드는 그림이다. 당시의 화조영모화에 이렇게 새가 떼거리로 등장하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다. 여기에서 임권택 감독은 동학운동을 일으킨 민중의 저항의식을 읽어냈다. 그러나 이종상 교수의 말마따나 장승업의 ‘피어 보지도 못한 저항 정신’을 후대 화가나 미술사가 들은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심지어 영화에서 장승업의 스승 격으로 나오는 개화파 지식인 김병문조차 그의 그림이 ‘진경(眞境)이 아닌 선경(仙境)이요, 소박한 현실이 아닌 과장’이라고 질책한다.



도올 김용옥은 나아가 장승업에 대한 왜곡된 신비화를 경계했다. ‘선경(仙境)을 헤매는 술 취한 화사의 호방한 붓질’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장승업 작품을 제대로 대면하는 순간 그의 놀라운 관찰력과 공필(工筆)의 사실성, 치밀한 구도, 그리고 ‘취객으로서는 일순간도 그 텐션을 견딜 수 없는 긴장감’에 압도되고 만다는 것이 도올의 찬사이다.
후대로 갈수록 장승업의 작품보다 기벽이 강조된 데는 그를 몰역사적·몰정치적인 환쟁이로 격하하고 싶어하는 식민사관의 영향도 컸다는 것이 이종상 교수의 지적이다. 최근에는 여기에다 대중의 흥미를 좇는 상업주의까지 결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원(김홍도)과 혜원(신윤복)을 의식해 ‘나도 원이다(吾園)’라고 호를 지었다는 장승업. 오랜 세월 외면당해 왔던 그의 자부심, 그의 예술혼이 이제 막 제 빛을 발하려 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