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 <중경삼림>
  • 李世龍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5.09.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왕가위 감독 <중경삼림>/소재·형식 잘 어울린 사랑 풍속도
홍콩의 시네아스트(cineaste:영화작가) 왕가위의 <중경삼림>은 재치 있는 대사와 어지러울 정도로 감각적인 영상이 돋보인다. 삐삐 세대의 감성으로 그들의 사랑법을 그린 이 영화는 ‘실연’이라는 고통의 무게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CF처럼 찍은 화면이 스토리텔링에 의한 드라마보다는 영상 효과를 중시하는 뮤직 비디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나른하면서도 거칠며 몽상적이기도 한 <중경삼림>은 사랑 찾아 헤매는 도시인들의 쓸쓸함을 비틀거리며 따라가는 카메라를 통해 두 개의 사랑과 실연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한다.

첫 번째 이야기. 전화통에 매달려 여자들에게 데이트를 애걸하는 사복 경찰 금성무. 그는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삐삐를 기대하며 자신의 생일인 5월1일자로 유효 기간이 만료되는 통조림을 구입하여 기다림처럼 수북이 쌓아놓는다.

5월1일. 실연을 털고 일어선 젊은이는 바에서 선글라스의 금발 여인 임청하에게 접근한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호텔로 직행하지만 여자는 깊은 잠에 빠진다. 젊은이는 음식을 잔뜩 시켜놓고 혼자 먹어치운다. 새벽. 젊은이는 잠든 여자의 흙투성이 신발을 자신의 넥타이로 깨끗이 닦아놓고 거리로 나선다. 운동장으로 간 그는 수분이 말라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조깅을 한다.

조깅·독백으로 실연 아픔 극복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실연한 경찰이 등장한다. 정복을 입고 근무하는 양조위는 헤어진 스튜어디스 애인을 잊으려고 집안에 있는 물건들과 대화를 나누며 산다. 그는 단골 패스트푸드점에서 여종업원 왕정문을 만난다. 과묵한 젊은이에게 호감을 느낀 왕정문은 몰래 그의 아파트에 들어가 거실의 기물을 하나씩 바꾸며 분위기를 띄운다. 이 당돌한 아가씨는 60년대 팝송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부르며 태양의 도시를 동경한다.

<중경삼림>은 이처럼 만남과 이별이라는 연애의 틀을 빌려 허무한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을 모자이크한다. 현란한 촬영술과 편집, 감각적인 음악으로 장식되는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결코 이별의 아픔에 징징거리지 않는다.

금성무는 실연의 아픔을 ‘조깅’이라는 움직임을 통해 털어버리고, 양조위는 ‘중얼거림’으로 해소한다. 그는 닳아빠진 비누에게 “그 여자가 없다고 자신을 학대하지 마. 넌 너무 살이 빠졌어”라고 말하며, 걸레를 향해서는 “그렇게 계속 울지마”라고 말한다. 사물을 의인화하면서 말을 거는 양조위의 독백은 빨아놓은 자신의 옷을 향해 “외롭니?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하며 다림질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는 신세대식 연애 풍속을 경쾌한 터치로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소재와 형식이 잘 어울린다. 이 작품이 옴니버스 형식을 선택한 것은, 젊은이들의 다양한 사랑법(사는 법)을 보여주기 위한 매우 요령 있는 방법이다. 이런 형식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감독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방법적 자각에서 출발하는데, 왕가위의 영화 문법은 아직 위대하지 않지만 그의 독특한 개성은 주목해야 마땅하다. 화면 한쪽에 널어놓은 빨래가 흔들리고, 빈 공간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잡은 광각 촬영의 한 쇼트만으로도 그의 영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전편을 통해 지나치리만큼 흔들리는 카메라는 정체성 위기를 맞은 홍콩의 심리를 반영한다. 두 개의 사랑이 모두 실연으로 끝나는 까닭도, 실제 지도 위에서건 감정 지도 위에서건 ‘만리장성’을 쌓을 수 없는 홍콩의 처지를 보는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