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도약대 앞에 선 부산국제영화제
  • 김영진 (영화 평론가) ()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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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인기 브랜드’ 만들어야
필자는 3년째 부산국제영화제의 ‘크리틱스 초이스’ 부문 선정에 관여하고 있다. 서울을 떠나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자원봉사자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면서 9회째를 맞는 영화제가 훨씬 더 체계적으로 치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1996년 첫 번째 영화제가 열렸을 때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거대한 혼란’이었다. 한국에서 국제 영화제를 처음 치른다는 흥분이 가득했지만, 동시에 ‘참조할 시행착오조차 없는’ 다급하고 막막한 상황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국의 젊은 관객들은 아시아 영화의 보급 창구 역을 자임한 부산영화제 깃발 아래 열광적으로 모여들었다. 마침 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위기에 빠졌던 한국 영화산업이 서서히 용틀임할 무렵이었다. 부산에 온 외국의 영화인들과 언론인들은 하나같이 영화제를 달구는 관객의 열기를 부러워했다.

남포동의 열기에 숨은 공허함과 피로

당시에 만난 아시아권 영화 감독들의 처지를 보면서 필자도 그들에게 동의했다. 타이완의 차이밍량 감독의 경우, 숱한 국제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자국에서 자신의 영화를 단 하루도 극장에 걸기가 쉽지 않다. 차이밍량 감독은 명성 덕에 해외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 수는 있지만, 영화제에서만 환영받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국의 관객과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에 지쳐 있었다. 그 뒤로 두세 차례 더 부산을 방문한 그는 볼 때마다 눈에 띄게 침울해 했다. 차이밍량은 젊은 관객의 열기가 살아 있는 곳에서 영화를 만드는 한국의 감독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일본의 감독이나, 체제 바깥에서 영화를 만드는 중국 감독들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영화제에는 늘 두 얼굴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올해도 남포동 거리는 떠들썩하다. 그러나 그 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공허하고 소란스럽기만 한 피로가 배어 있다. 개막작인 <2046>이 극장에서 상영된 후 왕가위 감독과 주연 배우 양조위가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사회를 맡은 필자는 너무나 열광적인 소녀 팬들을 보고 난감했다. 그들은 오로지 양조위의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 열광했으며, 급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를 지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회자로서 그 자리를 짧으나마 내실 있는 대화의 기회로 만들고 싶었지만, 이런 팬덤 문화의 복판에서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른바 대중 스타가 별로 오지 않는 부산영화제에서 세계적인 스타를 지척에서 볼 수 있으니 그들의 반응을 탓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또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명인이 남포동 거리에서 자신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대다수 영화들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도 하다. 일본·중국·이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에서 건너온 영화들은 대체로 스타와 장르를 내세운 자기 나라 주류 영화산업의 외곽에서 그 땅의 맨 얼굴을 비추는 운명을 자임하고 있다. 그런 작품들이야말로 소수의 대박 영화에 이목이 집중되는 극장가가 아닌, 별도 영화제가 따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환기한다.

어쨌거나 부산국제영화제는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으며, 10회째를 맞는 내년이 첫 번째 분수령이 될 것이다. 부산 현지에서 방송되는 각종 영화제 관련 특집 프로그램에서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한…’ 어쩌고 하는 멘트를 듣는 것은 이제 지겹다. 그런 자화자찬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이 영화제 바깥으로 나가서도 생명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다. 영화제는 커지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이곳에서 환영받는 영화는 시장에서 망한다’는 냉소적인 반응 또한 고개를 들고 있다.

장기적으로 ‘부산영화제 상영작’이라는 브랜드가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현실을 만드는 것이, 이 거대 영화제가 만들어진 초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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