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만에 제 모습 찾은 한국 최초 근대 소설
  • 안철흥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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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철 교주(校註) <바로잡은 무정>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연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나 프루스트, 혹은 정지용이나 염상섭을 읽은 적이 있을까. 구체적인 실체로서의 텍스트이든, 의미의 담지체로서의 텍스트이든, 수많은 텍스트가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지 않는 한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최근 출간된 김 철 교주(校註) <바로잡은 무정> (문학동네)은 바로 그런 안이한 문학 텍스트 독해에 일침을 놓는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 <무정>은 춘원 이광수(1892~1950)가 1917년 1월1일부터 그 해 6월14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한국 문학 최초의 근대 소설이다. 그러나 요즘 대다수 독자들이 읽은, 혹은 읽었던 <무정>은 당시의 그 소설과 다르다. 한글 맞춤법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를 거치면서 소설은 그 시대만큼이나 많은 격랑을 겪었다. 손질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지로 행해졌다.

원본과 이후 판본을 직접 비교해보면 사태의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소설 <무정>은,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교사 형식이 김장로의 딸 선형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어 가다가 친구인 신문기자 신우선과 우연히 만나 대화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둘의 대화 중 일부다.

“녀자야”
“요-오데메또오, 이이나즈께(약혼한 사)가 잇나보에 그려 움 나루호도(그려려니) 그러구두 내게 아모 말도 업단말이야 에 여보게”
“안이야 져 자네 모르겟네 김장로라고 잇느니…”
“올치 김장로의 일셰 그려 응 졍신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고 명년 미국 간다 그 쳐녀로구면 베리 꿋.”
이 문장이 1956년에 나온 광영사 판본에는 이렇게 바뀌어 있다.
“여자야.”
“참, 좋은 일일세 (약혼한 사람)이 있나보에 그려. 움 그러구도 내게는 아무 말도 없단 말이야. 에, 여보게.”
“아니야 저, 자네는 모르겠네, 김 장로라고 있느니…”
“옳지. 김장로의 딸일세 그려 응. 저, 옳지, 작년이지, 정신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명년 미국 간다는 그 처녀로구면. 베리.”

고어투는 물론 일본어가 섞인 신우선의 말이 모두 우리말로 바뀌어 있다. 소심하고 순진한 주인공과 쾌활하고 외래어를 자연스레 섞어 쓰는 당대의 ‘댄디보이’ 신우선의 대화를 그린 춘원 특유의 박진감 넘치고 생생한 표현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녀들과 반또가 이럇샤이를 부르고 네 사을 북편끗 하찌조마(八疊間)로 인도다’라는 문장을 ‘려관 하인들은 우리를 이층 팔조다다미방으로 인도한다’로 고친 것처럼 아예 문장 자체가 바뀐 경우도 있다. 근대 소설은 작가의 존재에 의해 성립된다는 명제에서 보면 이런 판본들은 <무정>이 아닌 다른 소설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 변형된 판본을 바탕으로 이광수의 문체를 논하는 사태까지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소설 <무정>은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후 식민지 시기에만 출판사를 바꾸어 가며 여덟 차례나 출간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박문출판사(1953년) 광영사(1956년) 삼중당(1962년) 우신사(1990년) 두산동아(1995년) 등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번 저질러진 왜곡은 수정되지 않은 채 재생산되었다. 김 철 교수와 강현조·김병길·김원규·박진영·함태영 씨 등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연구팀이 가동을 시작한 것이 3년 전. 이들은 춘원이 신문 연재본을 직접 수정해 출판한 ‘신문관’ 판본(1918년)을 중심으로 나머지 판본들의 문장 하나하나를 대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85년 만에 원본의 모습이 복원되었으니 <바로잡은 무정>이 한국 문학사에 기여할 바는 크다.

책 출간을 전후해 춘원 재평가 바람이 일 조짐도 보여 주목된다. 문학 전문 계간지 <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에는 이광수 문학의 현재적 의미를 되살피는 ‘이광수 특집’이 실려 있다. 그런데 김윤식 교수를 뺀 필진 전원이 연세대 국문과 출신이다. 김 철·신형기·이경훈 등 연세대 국문과 교수들이 최근의 탈식민주의와 근대성 비판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눈여겨볼 대목이다.

김교수는 <바로잡은 무정> 서문에서, “집단적 도덕의 명령은 추상이고 익명이며 그런 한에서 폭력이다”라며, 이광수 문학에 대한 평가가 민족주의 시각 때문에 왜곡되어 왔다고 비판했다. 김교수의 주장은 친일과 반일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떠나 텍스트에 천착하자는 의미를 깐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민족주의 비판의 연장으로 볼 만한 여지도 없지 않다. 지금껏 주로 추상 수준에서 전개된 민족주의 논쟁에 ‘이광수’라는 구체적인 텍스트가 던져진 셈이다.

도전이 있었으니, 응전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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