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숫자 놀음과 그 보복
  • 朴相基 <시사저널> 편집장 ()
  • 승인 1999.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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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민의 부실 신고와 당국의 부실 검증이 어우러진 ‘쌍끌이 부실’상태로 일본과 협상에 나섰다가 망했다. 이는 거짓된 숫자 놀음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 예고된 재앙이었다.”
어선 두 척이 그물을 끄는 ‘쌍끌이’는 이제 대단한 유행어가 되었다. 일본과의 어업 협상 과정에서 쌍끌이 부분을 누락시켜 어민의 공분을 사고 구걸하다시피 재협상한 해양수산부의 실수는 기가 찰 노릇이다. 재협상에서조차 복어잡이 어선 척수와 어획량 계산을 잘못해 받은 것보다 준 것이 더 많게 되었다고 한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가. 장관을 갈아치우고 협상 실무자들을 징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인가. 우리의 대외 협상 역사에 오점으로 기록될 쌍끌이 소동을 통해 최소한의 교훈이나마 얻어내는 것이 재발을 막는 길이다.

이번 협상은 패배가 예견된 게임이었다. 아마추어와 프로 선수 간의 대결과 같다. 일본은 20여 년 전부터 동북아 어업권 재편을 목표로 방대하고 치밀한 현장 실사와 정보 체계를 준비해 왔다. 일본 수산 공무원들은 한 달씩 어촌에 묵으며 어로 실상을 조사해 기초 자료를 만들었으며, 국제 협상 전문가들과 공조해 전략을 마련했다.

일본의 빈틈 없는 임전 태세에 비해 한국 정부와 공무원들의 협상 준비는 안타까우리만큼 안이했다. 협상 테이블에 오를 어업 자료부터 엉터리 통계를 집산한 것이었다. 정확하게 조업 지역과 어획량을 제시하지 못한 당국의 무능은 혹독하게 비판받아 마땅하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나 뒤적이는 탁상 행정의 병폐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다.

또 어민과 수협, 현지 수산 관리 체계의 잘못도 크다. 96년 말 현재 한국의 등록 어선은 7만5천여 척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등록 무허가 어선이 3만여 척으로 추산되며, 이 배들의 어획량은 원천적으로 집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뿐인가. 등록 어선조차도 조업 지역을 적당히 알리고, 조업 척수·어획량을 대폭 줄여 신고해 온 것이 관행이었다.

세금을 덜 내기 위해서였건 수산 당국의 규제와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건 거짓 신고와 불법 조업은 전국 어디서나 일상화한 삶의 방식이었다. 결국 어민의 조업 척수·어획량 축소 신고로 인해 어종·어획고 통계는 실상에 훨씬 못미쳤고, 전국에서 올라온 엉터리 통계가 취합되어 해양수산부 협상 자료로 쓰였다. 어민의 부실 신고와 당국의 부실 검증이 어우러진 ‘쌍끌이 부실’ 상태로 일본과의 협상에 나섰던 셈이다. 철두철미하게 협상 전략을 세운 선진 수산국 일본을 상대해 배타적 조업권을 다투는 중차대한 협상에 민·관이 이처럼 부실투성이 ‘허수의 통계’로 임한 것이다.허수의 사회가 IMF 사태 불렀다

거짓된 숫자 놀음인 허수가 지배하는 사회는 불투명하고 불안하다. 허수의 사회는 거짓 사회이며, 그 거짓을 감추려는 집요한 노력만큼 부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IMF 사태를 통해 부정직한 허수가 국가와 사회를 얼마만큼 위험에 빠뜨리는가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97년 가을 한국에서 썰물처럼 달러가 빠져나가고 외환 위기를 예고하는 국제 경보음이 울리는데도 당시 경제 관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한국 경제는 기초 여건이 튼튼하고, 3백억 달러가 넘는 가용 외환을 보유하고 있으니 위기는 없다는 것이었다. 환란이 터진 뒤 밝혀졌지만, 외환 보유고는 3백억 달러는커녕 30억 달러 남짓이었다. 허수를 내보이며 허세를 부린 관료들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한 장본인이었다. 정부도 경제학자도 기업도 국민도 허수에 속아 ‘설마’하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 IMF 사태이다.

허수는 날조이고 거짓이기 마련이지만 그 양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어획량 신고처럼 실제보다 대폭 줄이는 방법이 그 하나이다. 자영업자·전문직 종사자의 소득 신고 등 ‘마이너스 허수 놀음’이 일상화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 기업의 매출액 과다 계상 등 실제보다 대폭 늘리는 ‘플러스 허수 놀음’도 횡행한다. 눈앞의 이익에 따라 숫자를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허수 놀음을 그치지 않으면 언제 또다시 쌍끌이 협상이나 IMF 같은 날벼락을 맞을지 모른다.

실패한 한·일 어업협상에 이어 한·중 어업협상이 진행될 예정이다. 일본 못지 않게 외교 협상력이 뛰어난 중국을 상대하면서 부정확한 통계와 안이한 준비로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면 또다시 허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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