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제공, 지금이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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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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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쌀 지원이 국제 사회의 대세가 되고 있는 만큼, 쌀은 대북 협상 카드로서 효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지원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길 지금이 적기다.”
이른바 4자 회담 제의에 관해 북한에 설명하는 한·미 양국의 공동 설명회가 최근 뉴욕에서 열렸다. 설명회에서 보인 북한의 태도는 아직 모호하지만, 회담 결과를 두고 미국측 대표가 10점 만점에 9점을 매긴 것을 보면 전망은 밝은 편이다.

한국 대표도 설명회 결과에 대한 공식 논평에서, 이번 설명회가 △96년 4월16일 한·미 양국이 4자 회담을 공동 제의한 이래 처음으로 관계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담 추진 문제를 논의했다는 점 △북측이 한·미 두 나라의 공동 설명을 진지한 자세로 경청한 점을 볼 때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모호하기는 한국 정부의 대북 식량 지원 방침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국측이 밝힌 이번 설명회 결과에 대한 공식 논평은 △우리측은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4자 회담 개최를 공동으로 제의하게 된 배경과 4자 회담에서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조처의 일환으로 식량 문제를 포함한 남북 경협 추진 문제도 함께 논의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북한측이 구체적으로 제의해올 경우 이를 진지하게 검토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4자 회담이라는 ‘미끼’를 물어야 식량 지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공식 입장과 달리 한국 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이 4자 회담 참석을 약속하면 식량 지원 문제는 풀리지 않겠느냐”라는 유연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공동 설명회에 이어 미·북한 준고위급 회담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 또한 일부 한국 언론을 통해 “식량 사정이 어려운 우리에게 인도적 지원을 한다면 4자 회담 개최는 매우 낙관적이다. 특히 카길사의 50만t 곡물 거래에 대한 계약이 체결되면 바로 참석할 용의가 있다”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북한이 4자 회담에 얼마나 성의를 표시하느냐에 따라 식량 지원 및 경협 문제가 얼마든지 풀릴 수 있다는 것이고, 북한은 4자 회담 참석을 위한 ‘긍정적 분위기’를 먼저 조성해 달라는 것이다. 결국 이는 대북 협상 과정에서 늘 등장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해묵은 말 싸움의 연장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국제 사회에서 대북 식량 지원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유엔과 각종 비정부 단체들의 대북 식량 지원에 협조해온 미국은 지난 2월 세계식량계획(WFP)의 대북 식량 지원 요청에 응해 천만달러어치 지원을 약속했고, 한국 정부 또한 6백만달러어치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또 그때 지원을 ‘유보’한 일본 정부도 이번 설명회를 대북 접근 명분으로 삼아 2차 쌀 지원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곧 그동안 정부가 활용해온 대북 협상카드로서의 식량 지원이 더는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차피 지원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식량난으로 인한 전쟁 발발 가능성도 무시 못해

물론 한국 정부로서는 식량 지원에 쉽게 응할 수 없는 아픈 사정이 있기는 하다. 북한은 여전히 한국 정부한테 공식으로 식량 지원을 요청하지 않고 미국과의 접촉을 통해 식량을 얻으려는 한국 배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또 한국 정부로서는 95년에 ‘쌀 주고 뺨 맞은’ 아린 상처가 남아 있다. 또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이른바 군량미 전용설도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적극적인 지원은 안해도 적십자사를 창구로 한 민간 식량 지원은 묵인하고 있다. 또 <시사저널>의 ‘밀가루 북송’ 보도에서 드러났듯, 정부가 드러내 놓고 지원은 못해도 기업의 비밀 지원은 오히려 방임·조장하고 있다.

이처럼 이중적으로 북한을 지원하게 된 배경은 그만큼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하다는 인식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물론 군량미 전용설의 논리대로, 무조건적인 대북 지원은 북한 체제의 재강화로 인한 대남 위협 증대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식량난으로 인해 북한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쟁 발발 위협에 견주면 보잘것없다. 또 북한내 협상파의 입지를 강화해 강경파가 개입할 여지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기왕 줄 쌀이라면 지금이 기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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