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주인공을 너무 사랑하다
  • 노순동 기자 (sosisapress.com.kr)
  • 승인 2004.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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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인생
 
한작가의 아흔아홉 번째 작품. 작품 자체보다 그 맥락 때문에 더 회자될 수밖에 없다. 임권택 감독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은, 삼류 건달에 관한 영화이다. 영화는 ‘누구 하류 아닌 놈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라는 카피를 달고, 1950년대 후반 자유당 말기 혼란기부터 1970년대 초 유신체제 시기까지를 다룬다. 임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깡패를 동원하는 정치인, 정치인과 붙어먹는 깡패, 신념을 지키지 못한 운동권. 경제 성장말고는 사줄 게 없는 시대였다. 다시 돌아가 살라고 하면 사양한다”라고 말했다.

<하류인생>은 혼탁한 시대,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이 탁해졌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최태웅(조승우)은 학창 시절 이미 주먹깨나 쓰는 문제아였지만 나름의 의기와 순수함을 간직한 인물이다. 무도하게 구는 상대 학교의 깡패를 찾아가 용감하게 맞장을 뜬다. 하지만 뒤에서 칼로 찔리자, 최태웅은 칼을 다리에 꽂은 채로 찌른 놈의 집을 찾아가 사과를 받아낸다. 찌른 장본인은 한 정치인의 아들 박승문(유하준). 이 일로 최태웅은 후일 인생의 반려가 되는 승문의 누나 혜옥(김민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임권택, 스크린에 자신을 ‘투사’

승문 남매의 아버지 박일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자유당이 동원한 깡패에게 짓밟히고, 태웅은 이를 주도한 동대문파의 행동대원을 제압한 뒤 라이벌인 명동파에 화려하게 입성한다. 하지만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깡패 소탕령을 내리자 승승장구하던 태웅과 명동파는 각각 합법적인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건달 인생을 청산하고 영화제작자로 변신한 태웅은 영화판에서 쓴맛만 본다.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태웅은 명동파의 중간 보스였던 상필(김학준)의 휘하에 들어간다. 태웅은 상필을 통해 미군 군납업자들의 모임인 ‘친목회’ 일을 하며 담합과 로비의 세계에 눈을 뜬다. 태웅은 일단 야합에 길들여지자 탁월한 일솜씨로 위세를 떨친다. 방향을 잃은 채 달려가던 그를 끌어내리는 인물은 아내 혜옥. 교사 생활을 하는 혜옥은, 순수하고 의기가 있었던 청년 태웅의 타락에 진절머리를 내며 곁을 떠난다. 태웅은 1975년에 이르러 그 세계에서 발을 뺀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그의 인생이 맑아지는 조짐이었다’라고 토를 달아준다.

인생이 맑아지는 조짐이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임감독은 최태웅의 일생을 타락과 정화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진흙탕을 건너느라 잔뜩 흙이 묻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덜 묻히기 위해 애쓴 한 남자에 대한 애틋한 시선이 묻어난다. 영화는 간결체로 흘러가지만, 주인공 태웅에 대한 연출자의 감정이입은 점도가 지나쳐 끈적임이 느껴질 정도이다.

임감독은 전작 <취화선>에서도 화가 장승업을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자신과 닮은 구석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메가폰을 잡은 지 40년이 넘은 노감독이 스크린에 자신의 삶을 투사하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이번 작품에서 임감독은 대상과 거리를 확보하는 데 별 신경을 쓰지 못한 듯하다. 그는 추억에 젖어 설명을 등한히 했고, 회고하는 태도도 자주 흔들렸다. 체험하지는 못했을망정 많은 이들이 그 시대에 대한 정보를 가진 마당에 조각조각 드러낸 편린만으로 관점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아주 양야치로 살지는 않으려 애쓴’ 최태웅의 심정과 행보가 똑 그랬으리라는 짐작은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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