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화해에 웅변가는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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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5.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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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정책에서 필요한 것은, 북한의 난해한 행동 양식과 그들의 열망과 그들의 어법을 해독해 낼 수 있는 전문가이다.”
북경에서 열린 제3차 남북 당국자회담은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우성호 송환, 쌀 추가 공급, 북한 수재 지원 등 민족 간의 긴박한 당면 현안들은 거론조차 하지 못하고, 논의의 형식과 방법에 관해 논의하는 단계에서 회담은 깨지고 말았다. 이로써 매우 실무적이고 한정적 기능에 국한되기는 했었지만, 남북한 간에 바늘구멍처럼 열려 있던 ‘북경 창구’는 사실상 봉쇄되었고, 남북한은 다시 창구 없는 상태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북경에서 남북 실무 책임자들이 바늘구멍을 통해 대화를 시도하고 있을 때, 뉴욕에서 공로명 외무부장관은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북한의 인권 참상을 질타하고 규탄하였다. 북한이 파견한 유엔 관리 역시 논리와 정보와 입심과 발언 기회를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한국의 인권 문제를 법제에서 법 적용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고도 광범위하게 규탄했다. 외신에 따르면, 방청석의 외국 대표들은 냉전 종식 이후 모처럼의 진풍경에 아연실색하면서 침묵 속에 경청했다.

공로명 장관의 유엔 총회 연설은 두 가지 명백한 폐해를 유도해 냈다. 첫째는, 북한의 인권 참상에 관한 정치·외교적 공세가 북경 남북 실무회담 결렬의 환경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나타난 결과로 볼 때 부인할 수 없다. 둘째는, 북한의 인권 실태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겨레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공로명 장관의 유엔 연설은 북한 당국을 인권 개선을 위한 반성과 실천으로 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폐쇄적 자기방어 정책에 따른 공격성을 조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 유엔 관리의 응답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공로명 장관의 북한 인권 실태 규탄 연설은 북한의 인권 현실에 관한 사실적 정보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공장관의 연설은 사실적 정보의 공허함 위에 정치적 규탄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에 반해 북한 유엔 관리의 한국 인권 실태 규탄은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언론 활동이 북한에 견줄 수 없이 자유롭고 개방적이라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 당국자들이 북한에 대한 정보에 근본적으로 무지하다는 말도 될 수 있다.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안기부를 경유해서 제공되는 귀순자들의 ‘증언’이외에 북한 인권 정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사정이 북한의 절대 폐쇄성에 비추어 불가피하다 해도, 그같은 정보 빈곤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공세가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한국 정부의 정보란 결국 귀순자의 증언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고, 국제 사면위의 보고서는 정치적으로 왜곡되거나 취사 선택돼 왔다. 국제사면위 조사단 3명은 금년 4월부터 5월까지 북한에 공식 입국해서 인권 실태에 관한 조사 활동을 전개했는데, 아직 아무런 공식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면위 관계자는 4~5월의 북한 방문에서 아무런 현장 접근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북한 당국이 허용한 ‘사리원 노동수용소’만 현지 답사했을 뿐인데, 그 결과 역시 공표할 만한 것은 못된다고 밝혔다.

체제의 비교 우위 과시는 시대착오

사정이 이러할진대,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공적 확인의 영역 안으로 이끌어들여 그 현실적 개선에 접근하는 일은 유엔에서의 정치 공세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납북된 우성호 선원들을 귀환시키고, 북한 동포에게 쌀을 공급해 주어 그들이 입은 수재의 고통을 도와주는 것은 국가가 수행해야 할 매우 중대한 인권 사업이다. 이처럼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과제를 떠맡은 정부가 유엔에서 인권 공세를 감행함으로써 인권 문제의 구체성을 저버리고 체제의 비교 우위를 과시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북한에 대한 공로명 장관의 인권 공세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과 절차에서 신중성을 결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같은 정치 공세는 북한의 인권 문제 개선에 실제적으로 기여할 수 없을 것이다.

북경 남북 당국자회담 결렬과 공로명 장관의 유엔 연설은 한국의 대북 정책에 전문가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대북 정책에서 필요한 것은 국내 정치의 추이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가 아니며, 유엔에서 연설하는 웅변가도 아니다. 북한의 난해한 행동 양식과 그들의 열망과 그들의 어법을 해독해 낼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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