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 감독의〈와니와 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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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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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진학 대신 일을 선택한 6년 경력의 애니메이터 와니(김희선), 겉은 딱딱하고 속은 여린 달팽이처럼 그녀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 차가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심하고 어른스럽다. '진심을 담은 시나리오'로 데뷔하기를 원하는 시나리오 작가 준하(주진모), 장난기 많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속이 깊고 마음이 따뜻하다. 이 둘은 서로에게 쉼터가 되기를 원하면서 동거하고 있다.


어느 날 첫사랑인 이복 남동생 영민(조승우)이 귀국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와니는 잊었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와니는 영민을 사랑하게 되었고 영민 또한 그런 와니를 사랑했었다. 와니와의 사랑이 깊어지자 영민은 이를 피하기 위해 유학을 간 것이었다.


영민이 귀국하기 직전 여고 시절 그를 좋아했던 소양(최강희)이 와니와 준하의 집에 찾아온다. 준하는 그녀를 통해 와니와 영민의 사랑과 그 사랑이 남긴 와니의 상처를 감지하게 된다. 준하는 자신이 와니와 함께 사는 집이 와니와 영민의 추억까지 서려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현재의 사랑과 추억 속 사랑의 묘한 동거는 와니와 준하 모두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둘 다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준하가 집을 나가게 되는데….(11월23일 개봉 예정)



김영진★ 5개 중 3개

순정으로 표백한 트렌디 드라마?




〈와니와 준하〉는 원래 제목으로 내세울 예정이었던 '쿨'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대로 등장 인물의 감정 묘사가 '쿨'하다. 달팽이처럼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웅크리는 이들은 자기 감정이 상대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까 조심한다. 사랑이 맺어지고 깨질 때 격정에서 분노로 넘어가는 감정의 추한 하강 곡선이 없다. 이게 '쿨'하다는 것일까? 순정 영화라는 새 유형을 만들어낸 이 영화는 순정 만화에서 나올 법한 인물의 예쁜 사랑 이야기다.


〈와니와 준하〉는 최근 한국 멜로 드라마의 자기 도취적 경향의 극점을 보여주지만, 그만큼 세련되었다. 이복 동생을 사랑했다가 떠나보낸 와니는 준하와 살면서도 이복 동생을 잊지 못한다. 와니의 심리 상태를 전하는 이 영화의 스타일은 대담하다. 현재 장면에서 과거 장면의 인물이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오고, 전화 통화를 하는 상대가 수화기 너머가 아니라 와니의 맞은편에 태연히 앉아 있다. 과거의 흔적은 유령처럼 슬금슬금 와니의 주변을 차지하고 들어와 있다. 현재의 삶에 틈입한 과거의 흔적을 와니뿐만 아니라 관객도 지켜보아야 한다.


희한한 것은 그런데도 영화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이복 동생과의 사랑, 동성애, 혼전 동거 따위 금기가 이 영화에서는 일상의 부분으로 자연스레 포섭되어 있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동성애 묘사가 그랬듯이 이 영화는 순정이라는 이름으로 금기를 껴안는다. 그런데 이 순정은 과연 현실에 착지할 수 있는 감정일까, 아니면 만화에서 뚜벅뚜벅 영화로 걸어나온 캐릭터에 덧입혀진 인위적인 감정일까.


이 영화에 스며 있는 등장 인물의 아픔은 그들 성격의 인간적인 연약함과 온순함을 드러낼 뿐이다. 감정의 고저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어서 거꾸로 그들의 상실감은 세련된 화면에 가린다. 영화의 앞뒤를 꾸며주는 수채화풍 애니메이션은 어렸을 적부터 시작된 와니와 준하의 운명적 인연을 가리키지만 동화 같은 해피 엔딩은 언뜻 트렌디 멜로 드라마의 관습에 투항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 모든 예쁜 감정의 주름이 김희선과 주진모의 매력에 종속되는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혐의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해도 책잡을 만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조용하고 내적으로 웅크려드는 감상주의가 요즘 시대의 정서에 조응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와니와 준하〉는 일찍이 한국 영화에 없던 감정을 전시하고 있다.



심영섭★ 5개 중 3개

수채화 같은 멜로 사랑스럽지 않다




〈와니와 준하〉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온다. 화면의 물기는 그대로 〈와니와 준하〉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음의 번짐을 담아낸 화면은 이 영화 최고의 매혹이다. 화면은 한 장면씩 떼어놓아도 그대로 엽서의 배경이 될 수 있을 만큼 아기자기하다. 특히 수채화 질감 그대로인 애니메이션은 〈와니와 준하〉의 촉촉한 진심과 인연의 끈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와니와 준하〉의 화법은 수채화처럼 은근하다. 영민이 만화를 그리고 있는 와니의 방에 들어가 "한 시간 빨리 시계 태엽을 감았는데 자꾸 시계 태엽이 풀어져 버린다"라고 말하면 와니는 "너 그렇게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니?"라고 대꾸하며 미소짓는다. 어찌 보면 철없는 동생과 누이의 무심한 대사일 수도 있는 이런 정경은 이복 누이를 사랑하는 영민이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감지하는 순간,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와니와 준하〉는 순정 영화라는 단어에서 감지되는 복고적인 정서만으로 승부를 거는 순진한 영화가 아니다. 와니는 이복 동생인 영민과의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심하게 가슴앓이를 한다. 준하 역시 '동거'라는 기존의 사랑 방정식에 묻어나는 과격한 방종의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순정적이고 정갈한 사랑을 한다. 와니의 동료는 경찰관인 남자 친구와 동성애를 한다.


〈와니와 준하〉는 요즘 신세대 감독들이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일종의 모범 답안 같은 영화이다. 무엇보다도 은근한 대사의 행간을 곱씹어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기에는 1백20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고 늘어진다. 〈순애보〉나 〈접속〉의 계보를 떠올리게 하는 이 예쁜 엽서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키는 멜로의 힘을 모래알 같은 에피소드를 나열하느라 증발시켜 버렸다. 물론 살아 있는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김희선의 변신은 눈물겹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내면으로 들어가기는 아직도 역부족인 듯 보인다.


감수성과 섬세함이라는 측면에서 〈와니와 준하〉는 이제까지 어떤 한국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세필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디테일이 영화를 살릴 수는 없는 법.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면, 반짝이는 〈와니와 준하〉의 앙증맞은 '배려들'을 꿰매는 줄은 바로 멜로 장르를 다루는 감독의 '기본기'가 아니었을까? 굳이 신세대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다루지 않아도 관객을 조금만 더 배려했다면 〈러브레터〉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주 충분히 좋은 일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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