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가슴이 찢어진다.
  • 한향란 ()
  • 승인 2003.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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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막 ‘신두리 사구 지대’ 46만평, 망가질 대로 망가져
그곳에 가면 사막이 있다고 했다. 외국 사진에서나 보았던 사막이 진짜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니 ‘신두리해수욕장’이라고 쓰인 입간판 뒤로 견고한 성처럼 우뚝 솟은 횟집이 바다를 막아섰다. 바다쪽 베란다에 놓인 탁자와 의자는, 마치 ‘우리 집에 와 봐! 저 바다를 너만 볼 수 있게 해줄게’라고 유혹하는 듯했다.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안을 따라 늘어선 펜션·식당·슈퍼 마켓은 전형적인 여름 피서지 풍경이다. 그러나 신두리는 단순한 피서지가 아니다. 해안을 따라 길이 4km, 너비 500m 이상으로 넓게 펼쳐진 우리 나라 최대 사구(砂丘) 지대이다.

겉보기에는 잡풀만 무성한 쓸모 없는 땅처럼 보이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겨울 바람에 실려온 모래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다가, 여름 폭풍으로 다시 깎여 나가면서 해마다 수십 m씩 이동을 반복한다. 빙하기 이후 약 1만5천 년 전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두리 사구는 바람이 남겨놓은 세월의 흔적인 것이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군사 지역으로 묶여 그 원형이 잘 보전되었다. 그러나 일반인의 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수려하던 경관은 무서운 속도로 무너졌다. 투기와 개발 바람에 휩쓸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모래땅에 건물을 지어 바다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에 급급했다.

민박집들을 지나자 초소가 나왔다. ‘승용차 통제’ 표지판 뒤로 주민의 항의 표지판이 어지럽게 서 있다. ‘외국인도, 이완용의 자손에게도 인정해 주는 재산권을 왜 제한하느냐’는 땅 주인들의 불만이다. 2001년 11월 천연기념물로 가지정되면서 개발이 전면 금지되자, 땅 주인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총 46만평 가운데 북쪽 31만평만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해당 토지 소유주들의 불만은 더 크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 입구에 상근 공익근무 요원 1명을 배치하고 차량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한 달 전부터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사방으로 뚫린 31만평의 천연기념물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의 어깨가 너무 무거워 보인다. 공익근무 요원이 퇴근하는 오후 5시가 지나면 신두리는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된다. 심지어 오프로드 동호회가 4륜 구동 승용차 수십 대를 몰고와 사구를 누비기도 한다.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사구 곳곳에는 상처처럼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민박촌이 들어선,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사구 남쪽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사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졌고, 그 위에 낯선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신두리 3구에 사는 조정희씨(60)는 4년 전 5천만원에 산 땅을 얼마 전 8억원에 판 이웃이 부럽다고 말했다.

사구 지역에 있던 주민들의 땅은 이렇게 대부분 외지인들에게 팔렸고, 도시에서 온 땅 주인들은 움직이는 모래땅에 집을 짓기 위해 단단하고 견고한 축대부터 쌓았다. 이러한 인공 구조물들은 자유로운 모래의 이동을 가로막았다. 이동하지 못한 모래는 평평하던 해안에 굴곡을 만들고, 언덕에 부딪치는 모래는 계속 쓸려나간다. 결국은 해안의 자갈이 뼈처럼 드러나게 된다. 참담한 모습은 건물이 들어선 앞쪽 해안에서 쉽게 관찰된다.

새로 건물을 지으려고 다져놓은 땅 곳곳에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지역은 대부분 사유지이기 때문에 개발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

원래는 동서남북 사방 10리가 모두 모래만 있는 땅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지형이 바뀌고, 자고 나면 집 앞에 산처럼 모래가 쌓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모래는 지긋지긋한 손님 같은 존재였다. 참다 못해 방풍림을 심고, 모래땅에서 잘 자란다는 갯그령을 심었다.

갯그령을 시작으로 갯메꽃·통보리사초·갯방풍·해당화 등이 뿌리를 내려 모래땅을 단단하게 얽기 시작했다. 여름이면 하얀 모래 벌판이 초록빛으로 넘실거렸다. 풀이 지천으로 자라 소 키우는 데 더없이 좋았다. 주민들은 사구 위에 100마리가 넘는 소를 키웠다. 뒷발로 소의 배설물을 굴리는 쇠똥구리들에게도 이곳은 천국이었다.

사구 뒤쪽 움푹 팬 곳에 물이 고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습지가 생겨났다. 신두리 사구에도 두웅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사구 습지는 일반 습지와 달리 가는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바닷가인데도 바닷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이처럼 신두리 사구는 해수면과 모래밭, 배후 습지가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작지만 완벽한 생태계였다.

그러나 초여름을 분홍빛으로 황홀하게 물들이던 해당화 군락지도, 땀 흘려 쇠똥을 굴리던 쇠똥구리의 모습도 이제 모두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얼마 전 멸종 위기에 놓인 왕쇠똥구리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신두리는 더 이상 쇠똥구리들의 천국이 아니다. 떠나간 쇠똥구리를 불러들이기 위해 쇠똥을 사다가 뿌려 놓기도 했지만 쇠똥구리들은 사료 먹인 소의 똥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돌아오지 않았다.

외부 차량이 싣고 온 흙에 묻어 들어온 씨앗이 싹을 틔워, 지금 신두리 사구에서는 미국자리공 같은 외지 식물이 주인 행세를 한다. 한술 더 떠 해당화가 당뇨에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해당화를 캐어가는 바람에, 이제 신두리에서는 분홍빛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지천이던 해당화와 갯방풍 등은 숨바꼭질하듯 찾아야 겨우 달맞이꽃 사이에서 만날 수 있다.

“천연기념물이라고 지정만 해놓으면 뭐합니까? 부지런히 보호하고 가꿔야 하는데, 먹고 살기 바쁜 주민이 그거 지킬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아마 자꾸자꾸 개발되고, 이것저것 들어설 겁니다. 그러면 점점 더 모래가 없어져 결국 사구 지역이 사라져버릴 거예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대학생 신선식씨(25)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모래 언덕 보전을 위한 전문 인력과 예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한 쪽은 훼손하고, 다른 한 쪽은 복원하는 악순환 속에서 분처럼 고운 신두리의 모래는 옛날 이야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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