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아이 잘 키우는 수양 엄마의 ‘별난 사랑’
  • 宋 俊 기자 ()
  • 승인 1997.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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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수양 부모 제도(Foster Parents Syst- em):불우한(부모 사망, 수감, 알콜·마약 중독) 어린이를 안정된 가정에서 대신 양육해 주는 제도. 정부 기관·사회 단체가 주관하며, 수양 부모 지원자 리스트에서
박영숙씨(43) 집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이다. 학교가 파하면 우루루 아이들이 몰려든다. 집이 넓고 장난감이 많은데다, 박씨가 아이들에게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 예닐곱 명 중에는 노랑머리 아이 둘이 섞여 있다. 박씨의 아이들이다. 숀은 친아들이고 잭은 양아들이다. 한 살 터울인 두 아이는 친형제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형제가 된 지는 1년 남짓이다.

숀과 잭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96년 4월께이다. 잭은 고아가 아니다. 주한미군이던 친부는 잭을 버리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생모는 지금 동두천에 살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생활고에 시달려 잭을 양육하기가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지역 자선단체인 ‘두레방’을 통해 잭의 딱한 사정을 들은 박씨는 주말마다 잭을 데려다 보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에 잭은 심한 자폐 증세를 나타냈다. 피해 의식과 강박 관념이 뒤섞여 폭력적인 반응도 자주 보였다. 상태가 호전될 즈음인 그 해 6월께 박씨는 잭을 양자로 맞아들일 결심을 했다. 주말의 만남만으로는 잭의 장래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잭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당시 잭은 거의 문맹이었다. 말은 할 줄 알아도 한글을 전혀 쓸 줄 몰랐고, 영어도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박씨는 잭을 숀이 다니는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켰다. 학원에 보내 한글·산수도 따로 익히게 했다.

박씨의 보살핌은 금방 효과를 나타냈다. 잭은 활달하고 진취적인 아이로 바뀌었다. 동네 아이들이 무시로 박씨 집을 찾아와 뛰노는 것도 숀과 잭의 따뜻한 친화력과 무관하지 않다.
‘아줌마’라고 부르지만 쏟는 정 안 줄어

이같은 결과는 결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박씨는 영국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고 영국인 남편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살림살이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아이의 교육비는 의외로 부담이 컸다. 외국인 학교 수업료(월 70만~80만원)·학원비·학용품비·문화비(컴퓨터 프로그램·장남감 등)·옷값·용돈 등을 합하면, 한 아이당 교육비가 매달 1백50만원 넘게 들었다.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부득이 부업 전선에 나섰다. 주말이면 통역사로 활동했고, 방송 번역 및 기획을 맡기도 했다. 밤에는 원고를 썼다. 소설 <더블 크로스>와 교재 <영어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번역서 <존 메이저 영국 수상>과 <버지니아 울프의 항해> 등이다.

박씨는 부업을 하느라 아이들과 보낼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최근에는 바쁘기 짝이 없는 ‘엄마’의 심중을 헤아려, 아이들이 가사 부담을 많이 덜어준다.

잭은 박씨를 ‘아줌마’라고 부른다. 사는 모습은 영락없는 모자간인데 법적으로 이들은 엄연히 남남인 것이다. 입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종전의 한국식 양부모와 다르다. 호적에 올려 대를 이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양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박씨의 뜻이다. 따라서 호칭이 ‘엄마’든 ‘아줌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박씨는 잭이 자신의 처지를 바로 인식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박씨의 경우는 선진국에서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온 ‘수양 부모 제도’와 일치한다. 수양 부모 제도가 정착하려면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2000년까지 문제 청소년 2백만 명을 구제한다는 목표로 자원봉사자 백만 명을 양성하고 기업·언론·학교·민간 단체를 연계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불우 어린이 더 입양할 계획”

영국에서는 2만7천여 부부가 수양 부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의류·의료비·잡비는 정부가 댄다. 어린이 5~10명을 수양 어머니(혹은 부부)가 돌보는 가족 단위 수용소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호주에는 ‘아이들 마을’(아동보호소)이라는 가족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 한 수양 어머니가 어린이 8~9명을 맡아 한가족을 이루고, 10~16개 정도의 가족이 마을을 형성한다. 이들은 형제로서 우애를 다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영구 가족으로 정착한다.

박씨는 이같은 제도가 우리나라에 더 절실하다고 안타까워한다. 배타적인 혈육·가문 관념이 강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에 짓눌리다 보면 아이들이 자칫 문제아나 범죄자로 자라날 소지가 크다. 뒤늦게 경찰·교도소 등을 강화하는 대신 미리 이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한다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범죄로 인한 사회 불안도 줄어들 것이다.”

박씨는 건강하고 자유로운 가정 환경만 주어지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에티켓·소양 교육말고는 놀이도 공부도 아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되도록 그 결정을 이행하도록 유도한다.

이같은 믿음은 박씨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의 박씨를 있게 한 것은 꿈과 자유 정신이었다. 그 꿈과 자유를 좇아온 과정이 그의 삶이었다.

춘천에서 영어 교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박씨는 월급을 쪼개 비축하며 유학을 준비했다. 80년 박씨는 미국 오하이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영화 연출이었다. 부군도 그 때 만났다. 행복한 시절이었지만, 전공은 1년 만에 포기했다. 지도 교수로부터 “상상력이 부족하다. 사유의 범위가 좁고 단조롭다”라는 치명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다.

충격을 받은 박씨는 이를 극복하고자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 돈을 벌기 위해 먼저 뉴욕으로 갔다. 잡지사 기자로 뛰기도 했고, 한국 교포를 대상으로 한 영어 학원에서 강의도 했다. 주말 ‘파트 타임’으로 웨이트레스를 한 적도 있다.

이렇게 모은 돈을 가지고 유럽과 아프리카 전역을 돌았다. 82년 8월 남편과 함께 한국에 돌아온 박씨는 영국대사관에 취직했다. 84~86년에는 틈틈이 미국을 드나들며 서든캘리포니아 대학 야간 대학원에서 영어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86년 아이가 태어나면서 박씨는 비로소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라자 묻어두었던 정열이 ‘산 교육’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뿜어져 나왔다. 아들 숀의 손을 잡고 고아원·보육원·동두천 등지를 도는 것도 산 교육 중의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 양아들 잭을 만났다.

박씨는 새로운 꿈을 다듬고 있다. 우선은 수양 부모 제도 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머지 않아 한국인 불우 어린이 1~2명을 더 입양할 것이다. 자유를 찾아 출항했던 박씨의 오디세이는 어느덧 박애의 항구로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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