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전 국무총리“국민은 생동하는 정치 바란다”
  • 徐明淑 정치부 차장대우 ()
  • 승인 1995.10.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회창 전 국무총리. 그의 이름은 총리를 물러난 지 오래인 지금도 국민들에게 묘한 공명음을 남기고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개혁의 쓰라린 좌절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YS에게 ‘아니오’라고 말한 유일한 인물로 기억된다. 그가 퇴장한 시점은 김영삼 정부를 향한 국민적인 갈채가 서서히 잦아드는 시기와 묘하게 일치한다. 그는 총리 직을 떠난 뒤에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한국을 움직이는 10인’으로 2년 연속 거론됐다. 정치권으로 이동하지 않은, 가장 잠재력 있는 정치적 인물로 꼽히는 이 전총리와 <시사저널> 창간 6주년 기념 특별 인터뷰를 가졌다.

이 전총리께서는 이제 현실 관리나 제도 운영과는 관계없는 야인의 위치에 물러나 있는데도, 올해 <시사저널>의 여론조사에서 ‘한국을 움직이는 10인’으로 지목되셨습니다.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뭐라고 대답하기 거북하군요. 아마도 제가 과거에 해놓은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지역 분할 구도가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 정치의 구도와 문제들에 대한 이 전총리의 상황 인식을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현 정치 상황에 대한 국민들의 일반적 인식은, 정치가 무언가 생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생동과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국민 다수의 바람이라고 봅니다.

‘생동과 변화’를 갈구하는 국민들의 바람을 바탕으로 정치 현실을 개선하려는 사람들은 이 전총리를 마지막 대안으로 설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웃음) 글쎄 뭐, 저도 신문에서 그와 유사한 얘기를 잠깐 읽은 적은 있지만, 저 자신이 그쪽에 대해서 무슨 생각이나 계획을 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 백지 상태라고나 할까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현실 정치 문제에 대해서 왜 생각과 판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원론적인 발언조차 정치적 행로와 관련지어서 받아들이니까,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현실적으로 건설하려는 사람들의 의견과 제안은 직접 이 전총리께 접수되고 있겠지요?

(웃음) 정부에서 물러나 집에서 칩거할 때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있으니까 사무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전박대를 할 수는 없지요. 그런 정치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다녀간 적도 몇 번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그 쪽에서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을 계속해서 빈손으로 돌려 보내고 계시는 겁니까?

(웃음 … 부답)

‘이회창 카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거론되기도 합니다. 가령 여권에서도 선거의 마지막까지 마땅한 후보 대안이 없을 때, 이기기 위해서는 이 전총리를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으리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것은 좋지 않은 정치 관행입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간에 대통령 후보는 당내의 민주적 절차와 방식에 따라서 선택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명에 의한 후보 선택 방식은 그동안 우리나라의 정치적 후진성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어 왔던 문제 아닙니까.

최근 정치권 전반이 보수 회귀 현상을 보이고 있는 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보수·진보라는 개념이 아직도 정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국가의 역할을 따질 때, 국가가 국민 생활 영역에 어느 정도 개입하느냐, 또는 자율 영역에 맡기고 물러서느냐의 차이에 따라서 보수·진보의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자꾸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김영삼 대통령이 언명한 ‘깜짝 놀랄 만한 후보자’ 발언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우선 외국 언론을 향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발언의 형식부터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후계자’라는 인식도 적당치 않고, 대통령 후보는 여야를 막론하고 민주적 방식과 절차에 따라 선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는 여·야 모두로부터 서울시장 후보 제의를 받았고 이를 거절한 것으로 압니다. 정당이 마음에 안들었습니까, 아니면 서울시장 자리가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까?

그 어느 쪽도 아닙니다. 다만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안들은 모두가 사적인 교섭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교섭의 내용과 대응을 다 밝힐 수는 없습니다.

총리로 일하면서 김대통령의 국정 지휘권의 작용이나 추진 방식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까?

(웃음) 저는 현직에서 나온 사람이고 그 정권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나 정책 판단 내용을 비난하는 것은 저로서는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백 사람이 그런 말을 해도 저는 아직까지는 그 문제를 직접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우리 국민이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의식과 행태를 고쳐야 한다는 정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총리에 지명된 배경과 그것을 수락하게 된 경위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김대통령쪽 배경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감사원장으로 재직하면서 2주일에 한 번씩 대통령을 독대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총리 제안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깜짝 놀랄 만한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첫째는, 문민 정부의 개혁 정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의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라면 다른 자리에서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총리 직을 놓고 방탄 총리·얼굴 총리·대독 총리 같은 말이 있기도 했지만, 어떤 자리든지 그 역할과 기능은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이 하기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개혁을 위해서 매우 알맹이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렇게 수락하신 총리 직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되기까지는 총리로서 ‘알맹이 있는 일’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입니까?

개혁 정책 추진을 놓고 총리의 역할과 기능이 어떠해야 하는가, 정책 추진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쪽에서는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견해와 방식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혁 추진의 속도와 방식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면 제 견해와 방식을 바꾸고 거기에 적응하거나 자리를 물러나는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는 나중 길을 택한 거지요.


개혁 추진의 속도와 방법에 관해서 견해가 달랐던 쪽은 대통령입니까, 아니면 대통령을 보좌하는 집단들입니까?

(웃음) 그건 제가 아직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국무총리의 직무상 권한으로 장악되지 않는 정부 기관들이 있었을 텐데요. 가령 안기부나 국방부나 검찰 같은 기관들과의 마찰은 없었습니까?

특별히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제가 재임한 기간은 이미 안기부가 행정 각부의 업무에 간여하거나 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마찰이 일어날 소지가 없었지요. 또 부처 사이의 업무상 갈등은 과거 박정희 정권 때도 있었던 일이고, 당·정 간에도 이견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 정부의 개혁 정책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정권 후반부에 이르러 개혁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공감이 현저히 퇴색해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개혁이 목표대로 추진되고 있지 않다면 개혁에 참여했던 저도 일부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개혁은 일과성이나 전시용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보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문제는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정부가 보여준 몇몇 중요한 정책과 집행은 개혁의 기조를 자꾸 바꾸어 버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다 개혁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계층들의 저항이 겹친 것이지요. 개혁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정부가 개혁의 기조를 바꾸는 것처럼 보이면 개혁 자체를 불신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지금 정부 일각에서는 제도적 개혁은 어느 정도 달성된 것으로 보고 여타 분야로 개혁의 방향을 옮겨가려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 이 전총리께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지요?

지금 정권의 핵심부에서 개혁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개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개혁은 유행이 지난 것으로 보고 다른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인지 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으로는 개혁은 정권이 끝까지 추진해야 할 목표라고 봅니다. 개혁에는 기초적 개혁과 발전적 개혁, 그렇게 두 가지 범주를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초적 개혁은 부정부패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를 척결하는 것이고, 발전적 개혁이란 그 기초적 개혁의 토대 위에서 사회 각 분야의 능률과 성취를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기초적 개혁은 도덕적·규범적 가치와 행동 원칙에 관련된 것으로, 이것은 정권이 끝끝내 수행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또 개혁 정책이 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일부의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기초적 개혁의 달성은 선진화·세계화의 기초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기초적 개혁 위에서만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의 많은 발전적 계획들이 자리잡기에는 기초적 개혁이 아직 덜 되어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개혁 정책의 구체적 방향은 어떻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개인을 존중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무시하는 개혁은 지지받지 못할 것입니다. 개인 존중과 개인들 상호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바로 법과 질서의 역할입니다. 법질서를 국민들이 통치 수단으로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개혁을 궁극 목표로 하지 않는 정권에서는 개혁의 지속성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정권은 개혁을 추진하면서 도덕적 도그마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정권의 입장을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됩니다. 나라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입니다. 교조적이고 수직적인 권력의 힘으로는 민주적 개혁을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통치 행태가 바뀌지 않으면 국민과 국가의 바른 관계는 정립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법권의 독립성 문제가 다시 대두되고 있습니다. 대법원장 집무실에 걸린 대통령의 초상화를 내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자유당 말기에 초임 법관으로 인천지원에 취임했는데, 그때부터 젊은 법관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떼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모든 대통령의 초상화가 법원장의 머리 위에 걸려 왔지요. 대통령은 국가의 수반이니까 국가 원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면, 그 사진을 법원장의 책상 앞이나 다른 적당한 위치에 배치하면 된다고 봅니다. 태극기와 나란히 법원장의 머리 위에 걸어놓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라고 봅니다.

이 전총리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는 인상은 엄격한 원칙주의자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본인은 이런 평가를 수긍하십니까?

저는 평균인 정도의 원칙과 질서 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 동안 법관 생활을 오래 하고 감사원·중앙선거관리위원회·내각의 수장 자리를 거치다 보니까 직무상 자연히 원칙과 질서를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인상이 박힌 것 같은데, 제가 평균인 이상으로 유별난 고집불통 원칙주의자는 아닙니다.

앞으로 이 전총리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그동안 너무나도 집약되고 엄격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제 좀 한가해져서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행복감과 충일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즘, 이대로 너무나 좋습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