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국제인물] 젤렌스키, 패권국가와 약소국의 일반적 등식 완전히 무너뜨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2.12.29 09:05
  • 호수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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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대통령을 연기하던 배우에서 강력한 전시 영웅으로 거듭나”

[편집자 주]

2022년도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겨지고 있다. 후세대에게 2022년은 어떤 한 해로 기억될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북한의 잇단 미사일 도발, 미 연준발(發) 고물가·고금리 행진, 10·29 이태원 참사 등 연이어 나오는 우울한 뉴스들은 가뜩이나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지쳐 있는 국민을 더 숨막히게 만들었다. 그나마 누리호 2차 발사 성공과 월드컵 16강 진출의 투혼은 숨통을 좀 트이게 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가슴 아픈 일은 가슴 아픈 일대로, 기쁜 일은 기쁜 일대로 정확히 기록에 남기고자 ‘올해의 인물’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올해의 인물은 시사저널이 1989년 창간 첫해부터 매년 송년호에 발표하는 장기 연재기획이다. 특히 2022년에는 여론조사기관 시사리서치에 의뢰해 시사저널 정기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도 처음 실시했다. 시사저널 편집국과 본지 정기독자들이 선정한 2022 올해의 인물은 윤석열 대통령이다. 편집국 기자들도, 정기독자들도 의견이 일치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통령만큼 우리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없는 탓이다. 역대 대통령들도 대부분 당선된 첫해, 올해의 인물에 이름을 올리곤 했다.

이 밖에 정치 인물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제 인물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회 인물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 문화 인물에 ‘우영우’ 신드롬의 박은빈, 국제 인물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IT·의·과학 인물에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연예 인물에 BTS, 스포츠 인물에 축구선수 손흥민 등이 선정됐다. 올해의 사건에는 이태원 참사를 선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제외하고 2022년 국제 인물을 거론하기는 불가능하다. 지난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상원을 지킨 조 바이든 대통령과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국가주석도 있고, 2022년 초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며 국제사회의 표적이 된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있지만, 젤렌스키에게는 역부족이다. 젤렌스키는 패권국가에 맞서 국민과의 연대, 용기와 의지라는 리더의 덕목에서 2022년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지난 2월24일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희대의 국난 속에서 빛난 리더십이다. 병력과 무기체계가 10배나 되는 러시아의 침공 앞에 젤렌스키는 주눅 들지 않았으며, 국민의 의지를 모아 침략자를 응징했다.

젤렌스키의 용기와 리더십은 침공 초반부터 돋보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다음 날인 지난 2월25일 젤렌스키는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와의 통화 약속을 놓쳤다.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러시아 디스인포메이션 매체들은 젤렌스키의 국외 탈출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역정보 도구로 활용된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영 스푸트니크통신은 전날 하원 대변인을 인용해 “젤렌스키가 이미 폴란드 국경에 가까운 서부 리비우로 도주했으며, 영상은 사전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날 늦게 젤렌스키는 수도 키이우의 대통령 관저인 마린스키궁 바로 앞에서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있는 비디오 클립을 올렸다. 참모들이 든 휴대전화에는 당일의 시간이 표시돼 있었다. 미리 찍은 비디오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 젤렌스키는 “우리는 여기 있다”며 짧고 굵은 연설을 남겼다. 그는 “우리는 우리의 독립과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진실의 승리였다.

그다음 날인 지난 2월26일 벌어졌다. 러시아의 디스인포메이션 매체들이 젤렌스키가 이미 키이우를 떠났다고 요란하게 떠들고 있을 때였다. 이날 젤렌스키는 자신이 키이우를 떠났다는 디스인포메이션이 돌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는 짧은 연설을 SNS에 올렸다. 바로 그날 그는 키이우를 떠나라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SNS에 언급하면서 “싸움은 여기서 벌어지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피신이 아니라 실탄이다”고 말했다.

지난 4월4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가운데)이 수도 키이우 북서쪽에 있는 부차 마을에서 군인들을 독려하고 있다.ⓒAFP 연합

피신 제안 거절하고 수도에 남아 끝까지 항전

젤렌스키가 피신을 제안한 미국 측에 한 대답은 바로 그날 AP통신이 주영 우크라이나 대사관을 인용해 보도했다. 전날 워싱턴포스트는 미 당국자를 인용해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탈출을 돕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희생을 각오하고 국민을 결속시키는 지도자로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젤렌스키는 이날 저녁 SNS에 올린 영상에서 “우리의 결속과 용기가 러시아의 점령 시나리오를 깨뜨렸다”며 “세계는 우크라이나인의 강한 모습과 용기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 뒤 젤렌스키는 지난 3월1일 유럽의회를 시작으로 각국 의회에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나라가 크든 작든, 의원이 많든 적든 개의치 않았다. 4월11일에는 한국 국회를 상대로도 연설했다. 젤렌스키는 특히 상대 국가의 역사를 바탕으로 가슴 저미는 연설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영국을 상대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이 했던 연설을 인용해 “숲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계속 싸우겠습니다”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로 통일을 이뤘던 독일 의회에서는 “숄츠 총리, 저 벽을 허물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미국 의회를 상대로 연설할 때는 “진주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매일 진주만과 9·11을 경험하고 있습니다”라는 연설로 미국인의 공감을 끌어냈다. 기립박수를 부를 수밖에 없는 연설이다. 미국 의회를 상대로 연설한 직후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8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승인했다.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을 바탕으로 미국산 FGM-148 재블린과 영국제 NLAW 같은 대전차 미사일을 충분히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갑부대 중심인 러시아 지상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충분한 훈련을 받은 우크라이나 지상군의 과감한 접근과 공세도 큰 몫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젤렌스키는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그레미 시상식장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에 나타나 글로벌 여론을 모으는 역할도 톡톡해 해냈다.

이를 통해 젤렌스키는 유럽이 그토록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해냈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그토록 억제하려고 했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확장이 오히려 이뤄질 전망이다. 오랫동안 거의 모든 무기체계를 스스로 개발하면서 중립을 유지했던 스웨덴과 러시아와 1340km나 국경을 맞댄 핀란드가 지난 8월10일 나토에 신규 가입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 방이었다.

 

시사주간지 타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사실 위기가 고조되던 2022년 초까지 젤렌스키는 러시아로부터는 협상 상대로 인정받지 못해 서방국가와 러시아의 담판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침공 이래 우크라이나가 거센 저항을 계속하자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무기와 자금 등의 추가 지원에 나섰다. 분쟁지역에 살상무기를 제공할 수 없다던 독일도 입장을 바꿔 지대공미사일과 대전차 로켓발사기 등을 공급하기로 했다. 러시아와 협력 관계인 주요 산유국 아제르바이잔도 석유 지원을 약속했다. CNN은 수도에 남아 군과 국민을 독려하는 젤렌스키에 대해 “TV에서 대통령을 연기하던 배우에서 강력한 전시 지도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12월7일 2022년 ‘올해의 인물’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의 투혼’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타임 측은 “키이우를 떠나지 않고 남아서 지지를 집결하기로 한 젤렌스키의 결정은 운명적이었다”며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전혀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였다”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의 투혼’에 대해선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수많은 사람이 구현한 정신이라고 언급했다.

2022년 초까지만 해도 지구촌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동유럽 약소국의 지도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국민을 단합시키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끌어내면서 초강대국 러시아에 맞선 것이다. 오히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망명설·도피설까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역전됐다. 패권국가와 약소국의 일반적인 등식을 완전히 무너뜨린 인물이다. CNN은 21일 젤렌스키가 개전 이래 처음으로 국내를 떠나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고 보도했다. 바이든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포함한 18억 달러의 추가 안보지원을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절렌스키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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