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여자 피겨, ‘여왕’이 필요하다
  • 김양희 한겨레신문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4.11 12:00
  • 호수 16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년 베이징올림픽 티켓 두 장 놓고
5~6명 경쟁 펼치지만 독보적 기술 선수 없어

첫 번째 문제. 2018 평창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싱글 경기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은 누구였을까? 정답은 최다빈과 김하늘이다. 

두 번째 문제. 3년여 시간이 흐른 올해 3월, 피겨 세계선수권 여자싱글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은 누구였을까? 힌트를 주자면, 일단 최다빈과 김하늘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제2의 김연아’로 불리는 유영? 그도 아니다. 이제 감이 오는가. ‘퀸 연아’가 물러난 뒤 지금 한국 여자 피겨계는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한다. 남자 피겨에서 차준환(고려대)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과는 차별된다. 김연아를 보고 피겨스케이터 꿈을 키운 ‘연아 키즈’들이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유영ⓒ연합뉴스

1년 만의 국내 대회, 뜻밖의 결과…유영 탈락

국내 피겨 대회는 코로나19로 1년 가까이 열리지 못했다. 선수들은 각자 개인훈련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2월말 열린 종합선수권대회에서 꽁꽁 숨겨왔던 기량을 뽐냈다. ‘대회 없는’ 1년여 시간은 어떤 선수에게는 기회가 됐고, 어떤 선수에게는 위기가 됐다. 여자싱글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줬다.

종합선수권대회 1위는 김예림(18·수리고)이었다. 2위는 윤아선(14·광동중), 3위는 이해인(16·세화여고). 코로나19 팬데믹 전 국내에선 적수가 없었던 유영(17·수리고)은 3위 밖으로 밀렸다. 쇼트프로그램(이하 쇼트) 1위에 올랐던 유영은 프리스케이팅(이하 프리)에서 거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종합 4위에 그쳤다. 세계선수권 출전 티켓 또한 놓쳤다. 윤아선이 나이 제한에 걸리면서 2021 세계선수권(스웨덴 스톡홀름)에는 김예림과 이해인이 출전했다. 

김연아의 뒤를 이을 최고 기대주는 유영이었다. 기록이 말해 준다. 한국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공식 경기에서 트리플 악셀(3.5회전)을 성공시켰고, 2016년 국내 종합선수권에서 만 11세7개월에 우승하며 종전 김연아의 기록(12세6개월)을 깼다. 2018년에는 김연아 이후 처음으로 국내 대회에서 종합 200점을 넘긴 선수가 되기도 했다. 독보적 1위였지만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는 나이 제한(올림픽 직전 7월 기준 만 15세)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2019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유영의 단점은 올해 종합선수권에서 드러났듯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진다는 것이다. 트리플 악셀을 뛰면서 실수가 나온다. 공식 무대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뛰는 해외 선수들이 여럿 등장한 가운데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트리플 악셀을 뛰어야만 하는 터라 포기하기도 쉽지 않다. 3월 회장배 랭킹전이 끝난 뒤 유영은 “신체적·멘털적으로 제일 힘들었다. 대회를 많이 못 뛰어 실전 감각이 떨어진 면이 있다”고 했다. 

김예림과 이해인은 올해 처음 세계선수권에 출전했다. 김예림은 쇼트에서는 클린 연기로 깜짝 5위에 올랐으나, 프리에서 두 차례 실수하면서 아쉽게 종합 11위로 떨어졌다. 함께 출전한 이해인은  쇼트 8위, 프리 11위 등 종합 10위에 올라 한국 피겨 사상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톱10 진입에 성공했다. 한국 선수가 세계선수권 톱10에 든 것은 김연아(2007, 2008, 2009, 2010, 2011, 2013), 박소연(2014), 최다빈(2017), 임은수(2019)에 이어 5번째다. 이번 대회가 이해인의 시니어 데뷔 무대였기에 더 의미가 컸다.

이해인·김예림·윤아선·임은수(사진 왼쪽부터)ⓒ연합뉴스·EPA연합

“트리플 악셀 기술 가진 유영이 아직은 선두”

유영·김예림·이해인과 함께 임은수(18·신현고)가 있다. 임은수는 2019년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개인 최고 점수(205.57점)로 세계 10위에 올랐다. 김연아 이후 국제 무대에서 처음 종합 200점을 돌파한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번 국내 종합선수권 순위는 6위.

이들 넷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종합선수권·회장배 등을 통해 2007년생인 윤아선이 깜짝 등장했다. 윤아선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종합선수권 2위, 회장배 3위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안정적 높이의 점프가 최강점이다. 윤아선 또한 “점프 뛸 때 재미가 있다”고 말한다. 

김예림과 이해인의 세계선수권 활약으로 한국은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출전 티켓 두 장을 따냈다. 티켓의 두 주인공은 오는 9~10월께 열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결정된다. 김예림과 이해인도 다른 이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해야만 한다. 국가대표 선발전은 단판 승부가 아니다. 2~3차례에 걸쳐 진행해 합산 점수로 국가대표가 최종 결정된다.

전문가들은 여전히 유영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는다. 이호정 SBS 빙상해설위원은 “유영은 높은 기술력으로 한국 선수 중 가장 어려운 점프(트리플 악셀)를 뛰는 선수”라며 유영의 우위를 점쳤다. 유영이 컨디션만 정상이라면 국내에는 적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해인도 유망한 편이지만 체형 변화가 이뤄지는 시기라는 점이 걸린다. 갑자기 키가 크는 등의 신체 변화가 있으면 아무래도 훈련이 힘들 수 있다. 이호정 해설위원은 “김연아 이후 국내 선수층이 탄탄해진 편이어서 시즌마다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가 달라진다. 유영·김예림·이해인·임은수 외에도 김하늘(19·고려대), 위서영(16·수리고) 역시 베이징 티켓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일하게 트리플 악셀을 뛰는 유영을 제외하고 대부분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무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술 변별력은 떨어지는 편이다. 종합선수권 때 유영처럼 당일 컨디션에 따라 티켓 주인공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 세계 피겨 여자싱글은 쿼드러플 점프를 앞세운 러시아 선수들의 득세가 이어지고 있다. 세계선수권 3위에 오른 알렉산드라 트루소바는 프리에서 무려 5차례나 쿼드러플 점프를 뛰었다. 우승자인 안나 셰르바코바 또한 쿼드러플 플립을 성공시켰다. 2위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트리플 악셀로 가산점을 1.94나 챙겼다. 가히 ‘넘사벽’ 수준이다. 사카모토 가오리, 기히라 리카 등 일본 선수들 또한 구사 기술 수준이 높지만 한국 선수들이 따라잡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내년 올림픽에서 당장 메달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5~10위권 경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에 앞서 치열하게 전개될 국내 선발전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동안 수많은 ‘연아 키즈’가 뜨고 졌다. 그럼에도 계속 ‘연아 키즈’는 나온다. 경쟁 속에서 피겨 불모지의 토양이 튼튼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 피겨장에는 과연 누가 서 있을까. 앞으로 10개월 남짓 남은 시간이 답을 알려줄 것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