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과유불급] 천준 작가가 발견한 윤석열의 근대성
  • 전영기 편집인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6.21 08:00
  • 호수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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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준은 기이한 젊은이다. ‘윤석열의 어제, 오늘, 내일: 나는 내 페이스대로 간다’라는 부제가 붙은 《별의 순간은 오는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동갑인 30대 중반. 천준이 기이하다는 것은 토종 경영학 박사로서 빅데이터, 디지털 경제를 다루는 국제저널에 다수 논문을 실을 만큼 전문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전문성만으로는 쓸 수 없는 《세익스피어와 직장인의 4대비극》 《바흐, 혁신을 말하다》 《어른의 교양》 같은 인간 정신의 탐구서를 5권 이상 낸 데다 이제 한국 정치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윤석열을 상대로 본격적인 정치 평전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천준은 전업 학자나 작가가 아니다. 맞벌이 부부다. 퇴근해선 일정 시간 두 살바기 아기를 돌봐야 하기에 그가 저녁 약속을 잡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육아하고, 심야에 글을 쓰는 주경야독보다 혹독한 작업을 수년간 했으니 언필칭 586 기득권 세대에 속한 나로선 그의 치열한 생활 태도가 경이롭고 기이할 뿐이다.

낮에 일하고 저녁에 육아하고 심야엔 글쓰기

천준의 윤석열 평전을 읽어보니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 또한 기이했다. 그는 지난 30년 한국의 정치사를 ‘설욕의 10년(김영삼·김대중 대통령)’ ‘돈의 10년(노무현·이명박)’ ‘시대착오의 10년(박근혜·문재인)’으로 나눴다. 이 모두를 싸잡아 중세 봉건사회로 규정했다. 설욕의 10년이란 용어는 그 이전의 건국과 산업화 과정을 오직 타도와 복수의 대상으로 여겼던 양김 시대의 제왕적 풍조를 비꼰 것이다. 돈의 10년은 물신숭배가 인간의 정신적 숭고함을 갉아먹은 시대다. 노무현 대통령은 시장에서 좌충우돌하며 삼성과 밀월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소득 3만 달러만 외치지 않았느냐고 천준은 주장한다. 거짓을 아랑곳하지 않는 포퓰리스트 선동도 이때 본격화했는데 인간 내면을 우습게 여기는 물신숭배의 다른 표현이다. 시대착오의 10년은 박근혜 대통령의 궁중 정치, 문재인 대통령의 퇴행적 운동권 정치를 비판한 것이다.

천준은 윤석열 평전에 이렇게 썼다. “지난 30년 지도자가 스스로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어지러운 진흙탕에 몸을 담그는 사이 국민은 다양한 방식으로 불행을 반복해 왔다…. 박근혜 탄핵으로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정부는 친노 진영의 과거의 영광 회복에 주력하며 중세 국가로서의 면모를 다시 확인시켰다. 윤석열은 그 과정에서 새로 잉태된 기대주다. 그는 중세적 꼰대가 아닌 진정한 근대인을 바라는 시대의 요구에 명쾌하게 응해야만 하는 입장이다.”(297~298쪽)

 

‘윤석열 근대인론’은 관변·어용 사관에 대한 도전

천준이 윤석열을 근대인으로 묘사한 것은 연극 대사 같은 생경함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의 시대관에 따르면 당연한 귀결이다. 586 기득권 세대가 쟁취했다는 민주화 30년은 그 시대에 태어나 관찰자 시각으로 성장한 30대 지성들에겐 그저 5년 임기의 왕정 체제에 불과했다. 사람 한 명 바뀌면 온 세상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쏠려가는 부조리를 그들의 이성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천준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공정한 룰을 박근혜와 문재인 정부에 똑같이 들이댔다”는 윤석열로부터 중세적 감정에서 해방된 근대인의 면모를 간취할 수 있었다.

천준의 ‘윤석열 근대인론’이 상투적이며 자해적인 현대사 담론에 새로운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박정희의 건국·산업화 업적을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민주화 시대를 오직 악한 보수에 대한 선한 진보의 투쟁으로만 보는 관변 혹은 어용 사관에 새로운 도전 세력이 나타난 셈이다. 정작 윤석열 본인이 천준의 발견물인 근대인으로서 자의식을 갖고 있는지도 미지수다. 원튼 원치 않든 새로 설정된 근대인 좌표에 윤석열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전영기 편집인
전영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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