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엔 결코 섞이지 않는 두 세상이 있다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7.0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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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입지 좋은 곳’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외국 군대가, 돈이, 문화가 모여들다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대의 풍경. 서민 주거지와 한남동 고급 아파트 '나인원 한남'(오른쪽) 등 부촌이 서로 이웃해있다. ⓒ김지나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대의 풍경. 서민 주거지와 한남동 고급 아파트 '나인원 한남'(오른쪽) 등 부촌이 서로 이웃해 있다. ⓒ김지나

한남동과 이태원은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 동네’다. 그 안에는 서로 다른 두 세상이 이웃해있되 섞이지 않은 채 공존하고 있다. 한쪽은 고급문화의 첨단을 달리고, 한쪽은 온갖 다양한 기층문화를 포용하며 고유한 상권을 만들어왔다. 두 동네 사이 특별히 물리적인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각기 상반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먼저 미군 클럽문화부터 시작해 아프리카, 이슬람, 성소수자 문화까지 아우르는 다양성의 거리 이태원이 있다. ‘세계의 축소판’ ‘서울 속의 세계’란 별칭은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융합시키는 이태원의 에너지를 담아내기에 충분치 않을 정도다. 미군 손님들을 상대하며 맞춤 정장, 빅사이즈, 보세 등 독특한 패션문화도 함께 발달했다.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는 짝퉁 명품 시장은 삐뚤어진 개방성이 만들어낸 이태원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한편 한남동 쪽으로 가면 한국의 ‘비벌리힐스’라 불리는 고급 주택가와 명품거리가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재벌총수들의 저택이 있고, 유명 연예인들이 모여 산다는 호화로운 빌라가 그들만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그와 함께, 트렌디하면서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가격대의 쇼핑 포인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강남은 청담, 강북은 한남동’이란 명품거리의 공식을 완성했다.

지난 5월 한남동에 오픈한 구찌의 새 플래그십스토어 '구찌 가옥' ⓒ김지나
지난 5월 한남동에 오픈한 구찌의 새 플래그십스토어 '구찌 가옥' ⓒ김지나

제일기획 이사로 탈바꿈 시작한 ‘한국 속 유럽’

언뜻 역설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이 지역에서 유독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보다 여기가 서울에서 가장 입지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리적 장점이 처음에는 외국 군대를, 그 다음에는 돈을, 마침내는 문화를 끌어모았다.

한남동-이태원 일대의 넓은 문화적 스펙트럼이 두 부류로 뚜렷하게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종합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이 이태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이사를 온 이후부터였다. 주로 저녁 장사를 하던 이태원 상권이 낮부터 문을 열었고, 미군 손님들보다 젊은 크리에이터들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트렌드를 연구했다. 이런 경향은 2004년 리움미술관이 인근에 자리를 잡으면서 가속화됐다. ‘제일기획 쪽 어디어디~’ 라는 식으로, 사람들 머릿속에 새로운 이태원의 지도가 그려졌다. 그동안의 이태원 거리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한순간에 깎아내리며 이 일대의 변화를 칭송하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2010년 꼼데가르송 플래그십 스토어가 한남동에 문을 열면서 한강진역과 제일기획 사이는 이른바 ‘꼼데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꼼데길은 이태원의 자유롭고 이국적인 분위기와 한남동의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거리라고 설명되곤 한다. 유럽여행을 간다면 한 번쯤 구경하러 들어갈 법한 해외 유명 브랜드의 숍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매장들도 등장했다. 그렇게 꼼데길은 한국 속의 ‘힙한’ 유럽거리 풍경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구찌 가옥은 한국의 색동을 모티브로 한 제품군, 70년대 나이트클럽을 연상시키는 내부 인테리어가 특징적이다.  ⓒ김지나
구찌 가옥은 한국의 색동을 모티브로 한 제품군, 70년대 나이트클럽을 연상시키는 내부 인테리어가 특징적이다. ⓒ김지나

한남동 이태리 명품 브랜드, 한국 전통을 입다

꼼데길 시대가 열린 지 10년, 이태리 명품 브랜드 구찌가 이곳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며 또 한 번의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숍의 이름인 ‘구찌 가옥(Gucci Gaok)’은 별칭 같은 것이 아니라 매장의 정식 이름이다. 창립 100주년을 맞은 해에 구찌가 대한민국 서울에, 한국어로 매장 이름을 짓고, 한국 문화에서 모티브를 따 제품과 매장 내부를 디자인했다. 오직 구찌 가옥에서만 살 수 있다는 색동(saekdong) 제품라인이 단연 눈에 띄었다. 색동저고리를 변형시킨듯한 난해한 직원 유니폼부터 70년대 나이트클럽을 모티브로 했다는 내부 인테리어까지, 구찌 가옥에서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낯선 즐거움이 있었다.

구찌 가옥은 분명 한남동 고급문화의 명맥을 잇는 또 하나의 명품숍이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과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이곳만의 경험으로 버무리며 지금까지와는 한끝 다른 지점을 만들어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식상한 캐치프레이즈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미군 부대에서 시작된 이국 문화의 습격이 해외의 어느 거리를 복제하는 데 몰두하는 것을 넘어 한국만의 문화 자본으로 진화하는 현장을 목격한 것 같았다. 이번 구찌 가옥의 시도가 이 지역을 갈라놓고 있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대감을 주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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