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금수저’ 유학생의 마지막 질문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1.07.18 14:00
  • 호수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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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면과 철조망 ⑧] 김일성대 출신 김금혁씨, 中 베이징서 반체제 모임 조직했다 발각돼 탈북

분단 후 76년이 흘렀다. 북한 권력구조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사이 북한 주민들은 참 많이 변했다. 이와 관련해 증언해 주고 있는 탈북민들은 "변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코 통일불가론을 주장할 만큼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대한민국에 정착한 뒤 남북 간 가교 역할에 앞장서온 탈북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본다.<편집자 주> 

최근 치러진 국민의힘 대변인단 선발 토론대회에서 작은 돌을 던진 탈북민이 있다. 그는 북한 유력 사업가의 아들, 김일성종합대 출신, 중국 유학 경험 등 이른바 ‘금수저’ 스펙을 탈북과 함께 고스란히 포기했다. 2012년 3월 혈혈단신으로 대한민국에 정착한 뒤 혹독한 청년기를 지나왔다. 다시 대학(고려대)에 입학했고, ‘흙수저’보다 못한 환경을 온몸으로 맞으며 더 단단해졌다. 서른 살 김금혁씨 이야기다. 

ⓒ시사저널 최준필

국민의힘 대변인 선발 오디션에 참여한 동기는. 

“선발 과정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 선뜻 지원하게 됐다.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 백지상태에서 참가자들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경쟁하는 방식 말이다.” 

탈북민 출신 첫 공당 대변인으로 활약할 수도 있었는데, 탈락해서 아쉽지 않나.

“사실 대변인 자리에 큰 욕심을 품진 않았다. 2차 면접 탈락으로 토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은 정말 서운하다. (탈북민으로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참가자들과 경쟁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누가 봐도 엘리트, 토론 잘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붙어서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김씨의 행보는 그 자체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우선 탈북민들에게는 북한 고위직 출신이 아니어도, 화려한 업적이 없고 젊어도 실력과 비전만 있으면 얼마든 남한 주류 사회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비(非)탈북민들에겐 이토록 전도유망한 탈북 청년이 통일 시대를 대비한 자산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각인시켰다. 

올해로 남한 정착 9년째를 맞은 김씨가 처음부터 이렇게 건강하고 자신감 넘쳤던 것은 아니다. 롤러코스터 같던 20대를 힘겹게 지나 쟁취해낸 결과물이다. 북한에 있을 때 그는 명문 평양외국어학원을 거쳐 2009년 최고의 대학인 김일성대, 그것도 입학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한 외국어문학부 영문학과에 들어갔다. 북한 외교관 대부분이 배출되는 학과다. 강의실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가 수두룩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김씨도 할아버지가 노동당 고위 간부를 지냈고 아버지는 북한과 베이징을 오가며 크게 사업을 벌이는 등 남부럽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다.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선 중국 유학 기회를 얻는 행운도 찾아왔다. 북한 당국은 2009년 들어 문과 대학생들의 해외 유학 금지령을 거둬들였다. 화폐 개혁 실패와 젊은 후계자(김정은)의 등장 이후 각종 정책 기조가 움직이던 때였다. 막상 정책이 바뀌어도 유학할 수 있는 학생은 극소수였다. 부모 중 한명이 유학 기간 내내 동거해야 하고 유학 비용 전액을 각자 부담해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김씨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던 20여명 중 3명만이 유학길에 올랐다. 출신 성분과 학력에 집안의 재력까지 다 갖춘 김씨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예약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 부모님의 바람대로 외교관이 될 생각이었다. 하지만 출세의 디딤돌일 줄 알았던 중국 유학은 반대로 체제를 등지는 계기가 됐다. 

변화의 단초가 된 사건은. 

“2010년 초에 베이징어언대에 입학해 난생처음 남한 사람들을 만났다. 나 같은 유학생이었다. 어느 날 남한 친구들이 강의실에서 다짜고짜 나에게 ‘너희 북한은 왜 못된 짓만 일삼느냐’며 따졌다. 천안함 피격 사건이 벌어지자 분을 참지 못하고 북한 사람인 나를 몰아세운 거다. 나는 ‘남한 정부가 조작해 놓고 괜히 북한에 뒤집어씌우는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 다투고 몇 시간이 지난 뒤 남한 친구 중 하나가 쓱 와서는 술 한잔하자더라. 화해도 할 겸 술자리에 참석했다.” 

그렇게 남한 유학생과 교류해도 문제가 없었던 건가. 

“원칙적으로 북한 유학생은 한국인과 일절 접촉할 수 없다. 국가보위성 요원들이 집중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같은 반 북한 유학생들끼리도 서로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나는 운이 좋게도 같은 반에 다른 북한 유학생이 없었다. 더군다나 유력한 무역일꾼인 아버지가 보위성 요원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북한 당국의 감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활했다.”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앙금을 푼 뒤 농담도 하다가 자연스레 북한 얘기로 넘어갔다. 내가 살아온 과정을 설명하자 한 명이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정말 어렵게 살았다던데, 넌 완전 다르네’라고 말하더라. 거기에 대고 나는 ‘탈북민이 뭐냐’고 되물었다.” 

진짜 몰랐던 건가. 

“탈북민의 존재도, 그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충격을 받았다. 이어 친구들이 북한의 어두운 면을 추가로 알려줬다. 내가 아는 북한과는 정반대 이미지였다. 그때까지 나는 북한 정권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고 북한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없지 않았다. 혼란 속에 술자리를 대충 파하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을 켜서 남한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검색창에 ‘북한’을 쳤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펼쳐지더라. 밤을 꼬박 새우며 북한 관련 뉴스, 논문 등을 훑었다. 이날 이후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을 통해 북한 자료를 검색했다.” 

갖고 있던 신념이나 사상이 곧바로 무너져 내렸나. 

“그렇진 않았다. 이는 다른 북한 유학생도 마찬가지다. 해외로 나오기 직전까지 십여 년을 세뇌당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맞닥뜨리고도 ‘이것은 우리 공화국을 음해하기 위한 일종의 선전이지, 사실이 아니다’는 생각부터 한다. 북한 입장을 옹호할 만한 자료가 있는지 찾았지만, 없었다. 대신 더 구체적이고 심각한 내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증하려 몸부림치다 진실 앞에 저절로 무장해제돼 버린 셈이다. 

“사실관계를 찾아보면 볼수록 더 깊이 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을 자각하게 되더라. 북한 최고지도자 일가, 대규모 숙청, 정치범수용소, 평양 외 지역의 가난과 인권탄압 실태 등에 대해 알아가며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 지점에 이른 북한 유학생들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애써 진실을 무시하고 처음부터 몰랐던 척 과거로 돌아가는 것, 두 번째는 분노하며 북한 체제를 향해 울분을 토해 내는 것이다. 대부분은 전자를 택한다. 후자를 택했다가는 출세 가도는커녕 자신과 식구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씨는 이미 전자의 길로는 한 발짝도 갈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는 “모든 사실을 알고도 그냥 넘어갈 자신이 없었다”면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최고지도자 일가에 대한 분노가 쌓여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회상했다. 

결국 2010년 크리스마스 때 북한 유학생들이 모여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김씨는 폭탄 발언을 한다. “자, 이 중에 우리나라가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떤 친구는 김씨에게 “많이 취한 것 같다”고 핀잔을 주면서 “다시는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김씨는 굴하지 않고 “우리 같은 엘리트마저 현실을 외면하면 북한은 대체 언제 변할 수 있느냐”고 일갈했다. 

그날 이후 김씨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다시 공들여 설득해 독서 모임을 조직했다. 10여 명이 모였다. 일명 ‘베이징 주재 북조선 유학생 북클럽’이다.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선 공부부터 차근차근히 해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종합대학 내에 설치된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연합뉴스

어떤 공부를 해나갔나.

“일단 역사, 정치, 민주주의, 한국이나 중국의 발전상 등에 관한 책을 한국 도서 전문 서점에서 닥치는 대로 사서 함께 읽었다. 남한 유학생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남북한 정치에 대해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북클럽 멤버들이 세운 최종 목표는. 

“‘귀국해 각자의 자리에서 권력을 잡게 되면 서서히 세력을 형성한다. 형성한 세력으로 독재정권에 대항한다. 독재정권을 끝장낸 다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한다. 더 나아가 남한과 통일을 논의한다’는 것이 골자다.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군가 일어나지 않으면 변화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게 뻔했다. 새로운 세상을 먼저 경험한 우리가 나서서 사람들을 일깨우고 하나로 뭉치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갑작스레 사망했다. 혁명을 꿈꾸던 북클럽 멤버들은 흥분했다. 북한대사관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 대충 얼굴을 비치고 돌아오자마자 몰래 축하 파티를 했다. 기대감이 실망으로, 더 나아가 불안으로 바뀌는 기간은 가혹하리만큼 짧았다. 2012년 초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대거 중국으로 들어왔다. 급변 사태를 차단하기 위한 전방위 단속이 시작된 것이다. 북클럽 멤버 중 한 명이 플라톤 저서 《국가론》의 한국어 번역본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소환됐다. 주동자인 김씨도 감시망에 들어갔다. 

급기야 김씨는 2012년 2월8일 북한대사관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대사관 직원이 ‘비자 문제 때문’이라고 둘러댔으나, 김씨는 자신을 북송하기 위한 작전임을 눈치챘다. 남은 선택은 탈출뿐이었다. 그 길로 기숙사에서 빠져나온 김씨는 한국으로의 망명을 타진했다. 같은 시기 보위성 요원들은 물론 베이징에 있는 북한 유학생 전체가 김씨를 잡는 데 동원됐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기적적으로 한 한국인 목사의 도움을 받아 망명에 성공한다. 

북한대사관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북송돼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망명 이후 베이징에서 벌어진 상황은. 

“아버지가 즉각적으로 피해를 본 것으로 안다. 북클럽 멤버들의 경우 일부는 처벌받고, 일부는 살아남았다는 정도만 전해 들었다.” 

부모는 현재 평양에 살고 있나. 

“모른다. 그 뒤로 부모의 소식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나는 부모 앞에선 큰 죄인이다.” 

김씨는 한국에 정착한 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13학번으로 입학했다. 가족도, 아는 사람도 없이 덜컥 맞은 남한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초반에는 자존심과 오기로 버텼으나,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정착 후 힘들었던 점은. 

“당장 생활고가 눈앞에 닥쳤다. 북한에 있을 땐 일해본 적도, 일할 필요도 없었다. 중국 유학 생활 중에도 집에서 주는 용돈과 신용카드를 펑펑 썼다. 남한으로 와서 모든 생활을 스스로 감내했어야 했다.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근무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어떤 아르바이트를 했나. 

“택배 상하차, 고깃집·결혼식장 뷔페·패밀리 레스토랑 서빙 등 ‘아르바이트계의 해병대’라 불리는 것들은 다 해봤다. 영화 단역 출연도 종종 했다. 탈북민 대상 장학금은 일부러 받지 않았다. 북한에서 잘살다 온 사람이 장학금 혜택도 받으면 뻔뻔해 보일 듯해서다.” 

김일성대·금수저 집안 출신이라는 이미지와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김씨에게 생활고 못지않게 큰 짐이었다. 스트레스가 쌓이며 안면 마비,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김씨는 2019년부터 북한 인권 관련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다시금 사명감을 벼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씨는 2019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젊은 지도자 정상회의’에 연사로 참가해 “나는 자유가 없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북한은 ‘김정은’도 ‘핵’도 아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김씨는 요즘 방송 출연, 강연, 유튜브 채널 운영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는 해외 유학, 정치활동 등에 대한 꿈도 구체화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이 있다면. 

“북한에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선 대한민국 정치가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대북 유화책이든 강경책이든 전 국민적인 합의나 연속성이 없었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해서 기존의 정책을 완전히 ‘제로(0)’로 만드는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웠다. 진영을 아우르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정책을 만들면 정권에 상관없이 장기적으로 북한을 관리하거나 대북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한다. 이 같은 일에 보탬이 되고 싶다.”   

통일에 관한 생각은. 

“북한의 독재가 무너지고 정상 국가가 되는 게 첫 번째 스텝이라고 본다. 독재 종식 후에도 통일보다는 북한 사회 안정화가 우선이다. 경제, 인권, 교육 등 북한의 제반 수준이 한국 대비 4분의1 정도까지는 따라왔을 때 비로소 통일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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